수년간 제대로 시작조차 못했던 의료인 간 업무범위 조정 협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정작 핵심 쟁점이 빠졌다. ‘유령수술’ 혹은 ‘대리수술’로 대표되는 불법·무허가 의료행위 근절에 대한 고조된 기대감이 확연히 줄었다. 환자의 동의는커녕 누구도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지만, 실체를 갖고 매스를 들어 환자를 상대해왔던 누군가가 진정한 ‘유령’으로 거듭나 수술실을 계속해서 떠돌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될까?
만약 협의체가 이해관계를 떠나 환자의 건강에만 집중한다면 이들의 실망은 다시 희망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실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사회가 지독히도 자본 친화적이며, 그 구성원이 자기중심적인 듯하다. 오죽하면 보건복지부 이기일 보건의료정책관이 첫 회의에서 “의료인의 업무범위에 대한 논의의 장 마련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했을까.
실제 그동안 이 같은 자리가 성사되지 못한 배경 중 핵심에는 ‘PA(Physician Assistant, 의료보조인력)의 양성화’ 문제가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에는 PA라는 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모든 의료관련 업무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모두 주관해야하지만 사회적 요구를 충족할 만큼의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모든 진료영역을 감당할 만큼 의사를 늘리기도 어렵다. 의사 배출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의사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대되는 보상은 역으로 줄어든다. 당연히 우수한 인력의 지원은 줄고, 의료서비스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생명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술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춘 의사가 배출되기도 힘들어진다.
분명 딜레마다. 그리고 PA를 비롯한 이 시대의 유령들은 이 같은 딜레마 사이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의사의 수는 한정돼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진료하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며, 모든 질병의 고통에서 즉시 해방되길 희망한다. 그러면서도 주머니에서 나가는 비용은 최소한이길 꿈꾸다보니, 의사를 고용하는 병원이나 정부는 명의를 한계 이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손과 발, 지식과 체력을 늘려주는 방향으로 의료서비스 제공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들의 욕구와 현실의 충돌이 극단적으로 말해 병원들은 싼 인력을 손·발 대신 쓸 수 있도록 ‘진료보조’ 혹은 ‘수련’이라는 명목을 붙여 유령이 된 간호사나 전공의, 때론 영업사원이나 동의 받지 못한 의사를 세웠고, 사실상 적절한 보상을 주지도, 사람들의 요구를 억제하지도 못한 정부는 유령을 없는 취급하며 편법과 불법 사이의 줄타기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보건의료서비스를 끌어왔다. PA를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더구나 보장성 강화와 전공의특별법 제정, 사회의 인식과 분위기 변화 등 보건의료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바뀌며 외줄타기의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진입장벽이 무너진 상급종합병원으로의 쏠림은 중소나 대형, 수도권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서로가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에 선을 긋기 바빴다. 당연한 귀결이다. 지금이라도 협의의 장이 마련돼 다행이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핵심 쟁점을 제외한 채 진료와 진료보조의 업무를 구분할 경우 유령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공고해질 수 있다. 진료의 공백이 발생해 환자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협의체의 간사로 참여한 보건복지부 손호준 의료자원정책과장은 회색지대에 드러나지 않은 유령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PA라는 실체, 제도를 전제로 논의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면서도 “회색지대에 대해서는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병원계 관계자 또한 “의사와 간호사의 업무를 이야기하며 PA(유령)가 맡았던 업무에 대해 언급하진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복합적이고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문제인 만큼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논의가 발전적으로 마무리되길 기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기일 정책관도 첫 회의에서 “무엇보다 협의체의 목적은 환자가 우선시돼야하며 국민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협의와 타협으로 좋은 방안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분명 무면허 의료행위는 불법이다. 복지부와 국회는 지난 4월 의료법 27조 5항을 신설, 오는 10월 24일부터는 무면허 의료행위나 면허범위 밖의 행위를 요구할 수 없도록 못 박았으며 의지를 분명히 세우기도 했다. 부디 이들의 뜻과 의지가 관철되고 국민이 안심하고 건강과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기원한다.
판은 깔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협의 당사자들이 집단보다는 사회를 고려한 전향적인 자세로 임하길 희망해본다. 유령이 실체를 갖춘 유령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지속가능하면서도 국민과 사회를 최우선으로하는 보건의료체계가 갖춰질 수 있도록, 실망이 희망으로 바꾸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라는 충고 아닌 충고가 사회와 사람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