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의 별미인 냉면은 원래는 겨울에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 냉면을 겨울에 즐겼다는 기록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냉면의 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 여름 메밀과 가을 메밀로 나뉘는데, 그 당시 주로 재배되던 품종은 가을 메밀이었다. 또 찰기가 밀가루에 비해 적은 메밀을 면으로 만들면 면발이 푸석푸석하여, 뜨거운 국물에 넣으면 쉽게 풀어져 버리는 단점으로 인해 메밀 면을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넣어 먹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후기의 다양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냉면을 음력 11월 동짓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냉면은 고기 육수를 끓여서 식힌 오늘날의 냉면과는 달리, 추운 겨울날 장독대에서 갓 퍼올린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메밀 면을 만 형태였다.
동치미는 무로 담근 물김치로, 한자로는 동침채[冬沈菜]다. 즉, 겨울 동[冬]에 담근 침채[沈菜] 즉 ‘무로 담근 겨울김치’라는 의미다. 이는 침채(沈菜)에서 유래하여 딤채, 김채를 거쳐 김치가 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동치미의 주재료인 무는 십자화과 뿌리채소다.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세계 곳곳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무의 잎과 줄기에도 뿌리 못지않은 풍부한 영양가가 있다. 우리의 식단에서 무는, 동치미 뿐 아니라 깍두기나 김치 그리고 조림, 무말랭이 등으로 이용된다. 무청은 시래기로 이용된다. 무의 모든 부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식탁을 풍성히 채우는 고마운 채소이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전체 채소 재배면적의 30%를 차지한 적도 있으나, 현재는 8% 내외로 재배 면적이 감소하고 있지만 무는 여전히 우리네 식탁에서 사랑받는 채소이다.
무는 전분을 분해하는 디아스타제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밥이나 밀가루 같은 탄수화물을 과식하여 소화가 안 되고 위장 부위가 답답한 증상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 또 푸른 잎사귀 부분인 무청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해 나쁜 콜레스테롤을 흡수하여 체외로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또 장운동을 촉진하여 변비를 예방함으로써 장의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흰색의 뿌리 뿐 아니라 푸른 잎 무청에도 해독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카로틴, 철분, 칼슘 등의 미네랄 및 비타민 C도 풍부하다.
‘음식과 약은 같은 원리’라는 식약동원(食藥同源)에 충실한 무에도 부작용은 존재한다. 속이 차서 위가 냉하고 약한 사람이 빈속에 생무를 많이 섭취할 경우 속이 쓰릴 수 있다. 또 무의 성질은 기운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약한 사람 ‘특히 손발이 차고 맥이 약한 사람’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무의 효능을 <方藥合編>에서는 무(萊菔根)와 무의 씨(萊菔子)는 ‘소화기능을 돕고 막히고 뭉친 기운을 풀어 아래로 내린다’고 하였다.
萊菔子 辛治喘咳 下氣消脹功難對
萊菔根 甘下氣篤 消食痰嗽解麪毒
<方藥合編>
그러므로, 속이 뜨거워져서 머리로 열이 치우쳐 발생한 두통 환자에게는 무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조선시대 신만(申曼)이 저술한 의학서인 주촌신방<舟村新方>에는 ‘뜨거운 열증으로 인해 두통은 속의 열이 상기하여 머리로 몰려 치받은 상태’로 진단하고, 치료에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속의 열을 달래면 된다’는 처방을 제시하였다.
又炙火頭痛, 凍沈菹水, 飮之, 神效.
一方, 炭火頭痛, 冬沈菜水, 飮之神效.
<舟村新方>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추운 겨울에는 오히려 인체의 열이 안으로 뭉치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런 상태일 때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메밀 냉면은 열기로 뭉친 속을 다스려준다. 이를 한의학적 원리로 표현하면 ‘인체는 외부환경이 과하게 차가워지면 체내로 열이 더 뭉치는 상태가 되며, 이를 차가운 기운으로 치료한다’는 ‘이한내치열외한(以寒內治熱外寒)’이다. 이를 간단히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고 한다. 이런 한의학의 원리는 무더운 여름에는 오히려 속은 차가워지므로 따뜻한 기운의 인삼과 역시 따뜻한 성질의 닭을 이용한 삼계탕을 먹는 이열치열(以熱治熱) 즉 ‘이열내치한외열(以熱內治寒外熱)’ 원리와 맥을 같이 한다.
살얼음이 둥둥 뜬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메밀 면을 말아서 가족들과 함께 먹으며 차가운 겨울을 지내던 조상님들의 지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겨울이다.
박용준(묵림한의원 원장/대전충남생명의숲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