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한눈팔 겨를이 없다. 어느 길이 맞는지 고민하고 돌다리를 두들겨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직선으로 달려간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다는 확신에 말은 필요 없다. 오직 액션과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종착역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액션 급행열차의 쾌감이 대단하다.
2014년 개봉한 영화 ‘오피스’를 연출한 홍원찬 감독은 영화 ‘추격자’ ‘황해’을 각색한 작가이기도 하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 악’)는 ‘추격자’ ‘황해’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태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추격 액션을 선보인다. 최근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홍 감독은 “‘다만 악’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며 연출 이유를 밝혔다.
“제가 영향을 받은 작품들에 ‘다만 악’ 같은 캐릭터가 나와요. 그걸 좋아해서 한 번은 해보고 싶었죠.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 게 한편으로 올드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익숙한 이야기 안에서 최대한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한국영화는 다 짚어주느라 설명이 많잖아요. 그걸 일부러 피하고 싶었어요. 심플하게 인물의 목적을 짚어주는 게 과연 캐릭터의 매력을 올려주는 방법일까 하는 고민이 컸어요. 이해하지 못한 구석도 있고, 알 수 없는 구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죠.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액션과 스타일을 위해 과감하게 앞으로 쭉 달려가는 이야기를 보는 분에 따라선 단순하게 볼 수도 있고, 좋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악’에서 인남(황정민)은 관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인남과 대치하는 레이(이정재)는 반대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하는 독특한 인물로 등장한다. 홍 감독은 그래서 영화의 시작을 일본으로 잡았다. 캐릭터를 완성하는 과정에선 이정재의 역할이 컸다.
“레이는 허공에 한발 떠 있는 캐릭터예요. 제가 대본을 썼지만 정확한 이미지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죠. 이걸 구현하는 건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이정배 배우가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대화를 나누면서 만들어갔죠. 의상과 소품, 전체적인 콘셉트도 이정재 배우가 의견을 많이 주셨고, 처음 시나리오엔 레이의 얘기가 거의 없었는데 만들어가기도 했고요. 레이 같은 인물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영화에 안착시키려면 한국 느와르 영화처럼 등장하면 안 되고,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배경에서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본에서 첫 등장을 시켰어요. 일본에서도 이방인인 자이니치로 설정한 것도, 야쿠자들이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혼자 흰 옷을 입은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레이에게 정확한 개연성을 주고 ‘이래서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라고 설명하는 건 피하고 싶었죠.”
현실에 없을 것 같은 캐릭터를 설득하는 과정엔 영화의 색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방콕에선 노란 색감과, 인남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천에선 푸른 색감, 레이가 등장하는 일본에선 차가운 모노 톤 색감이 등장한다. 액션도 영화에 현실성을 더하기 위한 방식으로 설계됐다. 일대일 액션에서 순간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는 스톱모션 촬영을 도입해 타격감을 극대화했다.
“실제 같은 타격감을 주려고 했어요. 사전에 ‘다만 악’ 만의 액션 스타일을 만들자는 얘기를 했어요. 활극 액션이 아니라 리얼 액션으로 하기 위해서 동선이 정확하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빠른 편집으로 어떻게 때리는지 모르겠는 액션이 아니라, 맞으면 맞는 순간의 액션이 보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다가 이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스톱모션 촬영기법은 카메라 프레임은 고속으로 가지만 배우들은 저속 연기를 하는 방식이에요. 무술 감독님이 히든카드로 쓰려고 갖고 계셨던 아이디어죠. 완성된 그림을 보면 그렇게 찍었구나 하는데, 현장에서 보면 웃길 수 있어요. 태국 현지 스태프들은 ‘얘네 뭐 하고 있나’ 하는 시선으로 지켜보더라고요.”
제목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주기도문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홍 감독은 “원래 제목은 ‘모래의 요정’이었다”며 민망한 듯 웃었다.(극 중 인남의 딸인 유민(박소이)이 TV로 만화영화 ‘모래의 요정’을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제목의 ‘악’을 특정 인물이 아닌 이들이 사는 세계로 묘사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악’은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요. 비정하고 냉정한 세계가 우리 주변에,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적이진 않지만, 어딘가 존재하는 세계인 거죠. 극 중 인물들이 누군가를 구원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선한 인물이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도 구원이나 희망을 찾는 의지와 노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의 결말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생각한 거예요.”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