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69세’(감독 임선애)의 표면에는 69세 효정(예수정)이 병원에서 당한 치욕적인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고발하는 성장담이 놓여있다. 동시에 효정 스스로 무엇이 진실인지 기억을 더듬는 미스터리물이기도 하다. 경찰을 대신해 직접 진실을 찾아 헤매는 효정의 대척점엔 선한 얼굴의 29세 간호조무사 이중호(김준경)가 있다. 진실의 키를 쥐고 선악을 오가는 이중호는 묘한 존재감으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배우 예수정, 기주봉, 김태훈 등 익숙한 중견 배우들 속에 낯선 얼굴 하나가 눈에 띈다. ‘69세’로 첫 장편 영화에 데뷔한 이중호 역의 신인 배우 김준경이다. 학생들의 단편 영화, 드라마 단역으로 연기 경력을 쌓아온 김준경은 ‘69세’에 이어 올해 초 MBC 웹드라마 ‘엑스엑스’에 출연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압구정로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김준경은 첫 인터뷰라며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밝은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그는 ‘69세’, 그리고 이중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파격적인 캐릭터에도 쉽게 출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69세’를 만난 건 지난해 3월 제작사에 프로필을 돌리고 있을 때였어요.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디션 연락이 왔죠. 이중호 역할로 두 장면을 연기했는데, 너무 떨어서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나요. 감독님이 한 번 더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두 시간 동안 심층 면접처럼 대화를 했어요. 그때 감독님이 이런 소재에 이런 배역인데 괜찮겠냐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물론 이중호가 천인공노할 나쁜 놈인 건 맞지만, 대본을 보면 감독님이 자극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이중호도 단순히 나쁘게 낭비되진 않겠다고 생각했죠. 만약 가학적이고 자극적인 대본이었다면 고민했을 것 같아요. 임선애 감독님은 사려 깊고 다 배려해주는 분이세요. 감독님을 만나고 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을 수 있었죠.”
‘69세’에 출연하기로 결정된 이후 김준경에겐 두 가지 숙제가 생겼다. 하나는 까마득한 선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 그들의 연기를 자신이 망칠까봐, 잘못하면 영화를 준비한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하는 걱정이었다. 또 하나는 이해되지 않는 이중호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중호를 이해하려고 여러 측면에서 노력해봤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도 해보고 실화하고 하니까 기사도 많이 찾아봤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기사에서 중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죄의식이 없다는 표현을 봤어요. 사람이 나쁜 일을 할 때 어떻게든 합리화를 한다고 하잖아요. 나쁜 일을 했지만 죄책감이 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에서도 합의 하에 이뤄진 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표현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했겠다고 이해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억울한 것처럼 연기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중호를 이해할 수 없겠더라고요.”
김준경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뒤늦게 연기에 뛰어든 경우다. 잠깐 경험해보려고 발을 들인 배우의 길을 벌써 5년째 걷고 있다. 연기학원에서 테크닉을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며 경험을 쌓아왔다.
“이전엔 배우가 될 거라는 상상도 해본 적 없어요. 대학교를 한 학기 남겨놓은 26세 때 막연히 잠깐 외도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전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찾아갔어요. 영문학 수업에서 작가가 왜 이렇게 썼는지 이해하는 게 재밌었고, 이걸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연기로 이어진 거죠. 선배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좋은 인생을 살면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내용을 봤어요. 제가 연기를 오래 할 거면 학원에서 테크닉을 배우는 것보다 현장으로 다니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기를 시작하고 처음 2년은 주로 학생들의 단편 작품을 찍었어요. 그게 쌓여서 3년차부터 드라마 단역을 시작했고요. tvN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 선배와 대결하는 일본군 장교로 나왔는데 많이 알아봐주시더라고요.”
김준경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묻자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은 ‘오랫동안 은근하게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걷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의미였다.
“예수정, 기주봉 선생님들을 보면서 묵묵히 오래가는 게 아름답다는 걸 느꼈어요. ‘69세’를 하면서 선생님들이 제가 가야 할 이정표를 찍어주신 것 같아요. 그동안 그게 없어서 막막했거든요. ‘69세’는 굉장히 보편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영화에 참여하고, 이 영화로 데뷔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도 영광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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