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뭔가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준경(박정민)의 관심은 온통 기차역에 쏠려 있다. 마을에 기차역이 생기면 위험한 기찻길로 다니다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오직 그 생각에 빠져 청와대로 편지를 수십 통 보내고 대통령과 만나기 위해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한다. 기차역이 곧 그의 꿈이다. 다른 꿈을 권하는 라희(임윤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가지만 보는 영화 ‘기적’(감독 이장훈) 속 준경의 고집은 배우 박정민과 닮았다. 남들처럼 잘 다니던 대학교를 중퇴하고, 홀로 배우의 길을 걸었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어려운 역할에 깊이 몰입하고, 어느 영화에서나 제 몫을 해냈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박정민은 꿈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기적’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기적’엔 준경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이 나와요.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공감할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대본을 읽고 가장 먼저 들었어요. 한 번쯤 꿈을 가져본 사람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위해 노력도 많이 했을 거라 생각하고요. 꿈을 가진 사람에게 그 꿈을 응원해주는 사람은 정말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제 꿈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방관하는 사람과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기적’이 꿈을 가진 분들에게 작은 응원이나 위안이 되어드리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1일 ‘기적’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박정민은 한국 나이 35세로 극 중 고등학생 역할을 연기한 부담을 털어놨다. 처음엔 나이에 대한 부담으로 출연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장훈 감독의 설득으로 출연하게 됐다. 박정민은 간담회 당시 “다시는 고등학생 역할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10대 역할을 꽤 많이 했죠. 데뷔도 고등학생 역할로 했고(영화 ‘파수꾼’), 잠깐 나오는 장면에서 고등학생을 연기한 적도 있고, ‘시동’에서도 자퇴한 고등학생을 연기했어요. 그 역할들이 저한테는 알게 모르게 재밌는 경험이었고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같이 성장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죠. 제가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면서, 고등학생 역할과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는 제 모습을 봐요. (고등학생 역할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음은 변치 않고 있어요. 자꾸 고등학생 역할을 제의받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몇 번 고등학생 역할로 영화를 찍어서 감독님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박정민은 ‘기적’ 촬영 전부터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연기한 준경 캐릭터의 모습은 이미 대본에 모두 나와 있었다. 감정을 어떻게 다뤄서 표현해야 할지 크기에 대한 계산에 집중했다. 나머지는 현장에서 어떻게 즐겁게 촬영할 수 있을까에 달렸다. 박정민은 배우 임윤아와 이성민, 이수경과 호흡에 만족하며 “유별나게 행복했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고 했다.
“임윤아가 출연한다는 얘길 듣고 고마웠어요. 팬심을 떠나서 큰 배우인데 이 역할을 해주는 게 행복했어요. 임윤아는 이미 너무 좋은 사람이고, 제가 어떤 장면에서 말을 하건 여유롭게 받아주는 그릇이 큰 사람이에요. 내가 임윤아에게 이래도 되나, 이러면 안 되지 않나 할 정도로요. 앞으로 휴대전화 번호가 바뀌면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성민 선배님과 장면을 만들 때는 좀 많이 놀랐어요. 경이롭다고 해야 하나요. 생각지도 못한 깊이감 있는 연기들을 제 앞에서 하고 계시는데 ‘저걸 어떻게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이 계속 생겼어요. 저 나이가 되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 정도로 연기하면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수경은 배우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 전부터 이수경이란 배우를 너무 좋아했고 팬이었거든요.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마음을 수경이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박정민은 작품이 나올 때마다 호평받는 배우 중 하나다. 역사 속 인물부터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인물, 성 소수자, 래퍼 등 매 작품 다양한 역할을 진짜처럼 소화해냈다. 박정민은 항상 “관객분들에게 영화에만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실제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강박이 있다는 얘기였다. 최근엔 이전보다 현장에서 더 밝아진 모습을 스스로 느낀다고 했다.
“요즘 제가 굉장히 유쾌해진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만큼은 텐션이 이전보다 더 올라가 있더라고요. 작품에 참여하는 태도도 유연해진 것 같고요. 예전엔 혼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못하면 막 혼자서 자책했어요. ‘기적’을 만나고 난 다음 ‘지옥’, ‘1승’, ‘밀수’ 등의 작품을 찍었는데 제가 더 즐겁게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적’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적’을 응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저만의 꿈에서 한 발짝 나가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 영화가 아닌가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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