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미 300석. 심 봉사가 덜컥 시주를 약속했을 때, 딸 심청의 마음은 어땠을까. 인당수에 뛰어들기 위해 뱃머리에 선 심청.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아버지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모의 빚을 대신 갚는 청년은 2024년에도 존재한다. 적금을 깨 생활비를 보태고, 대출을 받아 부모 빚을 메운다. 부모 자녀 간 모든 금전 거래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탁은 자녀의 경제 기반을 부수고 회복 불가능하게 만든다. 쿠키뉴스는 지난해 하반기 부모의 금전 요구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취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협박을 듣거나 폭력에 시달린다. 신용불량에 빠져 빚에 허덕이고, 때로는 죽음까지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정사로 축소돼 드러나지 못했던 이야기다. [편집자주]
돈 달라고 협박하기, 명의 도용해 대출받기….
부모가 자녀를 경제적으로 조종하거나, 압박해도 처벌할 수 없다. 가정폭력법은 신체·정신·재산 피해 행위만 폭력으로 본다. 물건을 부수는 등 물리적 파손만 재산 피해로 인정한다. 아동학대법도 마찬가지다. 신체·정신·성적 폭력이나 유기‧방임만 학대로 규정한다.
경제적 학대 피해자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경찰과 법원 등에 도움을 청하기 힘들다. 특히 부모·자녀 관계라는 특수성은 폭력이라는 인식을 흐릿하게 한다.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화해하라는 분위기로 흘러가기 일쑤다. 수사 긴장도나 집중도도 떨어진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부모를 신고‧고소하는 것을 두고 수사기관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형법상 특례인 ‘친족상도례’도 장벽이다. 친족상도례는 직계혈족이나 동거 중인 친족, 배우자가 재산 범죄를 저지르면 그 형을 면제하는 것이다. 사기죄에 해당하는 명의도용도 친족상도례에 가로막힌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 규모 파악이 안 된다는 점이다. 부모-자녀 간 경제적 학대 실태 조사는 없다. 가정폭력법 시행규칙에 포함하면 조사할 수 있으나, 방치된 상태다. 정의되지 않은 학대를 조사할 이유도, 담당할 부처도 없다. 여성가족부(여가부)의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경제적 항목이 있으나, 배우자‧파트너 간에 생기는 폭력이 주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학대를 당하는 자녀가 적지 않을 거라는 짐작만 가능하다. 2022년 여가부에서 발표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응답자 0.5%가 배우자·파트너 외 가족원에 의한 경제적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했다. 현재 경제적 학대에 대한 사회 인식이 부족하고, 외부에 쉽게 말하지 못한다는 특성을 고려하면 실제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백을 메우려는 입법 시도가 있었으나, 진전은 없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18년 경제적 폭력을 가정폭력에 포함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지난해 2월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도 계류 중이다. 해당 법안은 사기‧횡령‧배임 등 경제적 학대를 아동학대범죄로 규정하는 내용이다. 이달 15일부터 내달 8일까지 열리는 임시회에서도 처리하지 않는다면, 제22대 국회가 시작하는 5월 말 자동 폐기 예정이다.
전문가는 법이 사회 인식에 맞춰 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종언 법무법인 존재 변호사는 “한국 민법은 1960년대에 머물러 있다. 공동체 사회와 가족주의를 근간에 뒀다.”며 “지금은 2024년이다. 가족보다 개인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법체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