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미 300석. 심 봉사가 덜컥 시주를 약속했을 때, 딸 심청의 마음은 어땠을까. 인당수에 뛰어들기 위해 뱃머리에 선 심청.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아버지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모의 빚을 대신 갚는 청년은 2024년에도 존재한다. 적금을 깨 생활비를 보태고, 대출을 받아 부모 빚을 메운다. 부모 자녀 간 모든 금전 거래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탁은 자녀의 경제 기반을 부수고 회복 불가능하게 만든다. 쿠키뉴스는 지난해 하반기 부모의 금전 요구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취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협박을 듣거나 폭력에 시달린다. 신용불량에 빠져 빚에 허덕이고, 때로는 죽음까지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정사로 축소돼 드러나지 못했던 이야기다. [편집자주]
해외 전문가들은 부모의 금전 강요가 경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부모가 자녀의 경제권을 통제하거나 침해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해외, 특히 영국에서는 경제적 학대 연구와 시민단체 활동이 활발하다. 가정폭력 국가지원센터(NCDV·National Centre for Domestic Violence)가 대표적이다. NCDV는 가정폭력법을 개정하려 지난 26년간 영국 사법부를 설득했다. 가정폭력법 처벌 대상에 경제적 학대를 포함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 덕에 지난 2021년 법이 개정됐다.‘경제적 학대에서 살아남기(SEA·Surviving Economic Abuse)’도 주목 받는 비영리단체다. SEA는 경제적 학대 피해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공론장을 제공한다. 은행 등 금융기관과 협력, 전문 재무 상담가를 피해자와 연결해 주는 역할도 한다.
쿠키뉴스는 NCDV와 SEA 관계자를 지난해 10월25일 단독 화상 인터뷰했다. 해외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부모가 자녀에게 대출 및 명의대여를 강요하는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까.
관계자들은 ‘효’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 주목했다. 자녀가 부모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봤다. 샤론 브라이언 NCDV 총책임자는 “한국은 가족 중심적인 나라”라며 “자녀들은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만다 베킨세일 SEA 홍보대사는 한국에서 부모 자녀 간 경제적 학대에 대한 논의가 더딘 현상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부모의 강요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사만다 SEA 홍보대사는 “이미 수많은 한국 청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제적 학대에 노출돼 있을 것”이라며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부모의 경제적 학대에 어떻게 대응할까. 사만다 SEA 홍보대사는 “영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본인의 빚을 대신 갚아 달라고 강요하면 처벌 대상이 된다.”며 “자녀가 만 18세 미만일 경우는 아동학대법 위반, 18세 이상일 경우는 착취 및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가정폭력법이 개정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도 했다. 그는 “영국의 법은 완벽하지 않다.”며 “경제적 학대에 대한 사법부의 이해도가 낮다.”고 지적했다. 사만다 SEA 홍보대사는 “경찰, 판사, 배심원 등의 이해도에 따라 빚을 강요하는 부모가 기소되지 않거나, 재판에 회부되더라도 매우 관대한 형을 받는다”며 “이런 이유로 아직도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학대 인식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샤론 NCDV 총책임자는 “사람들은 경제적 학대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언론에서 계속 다뤄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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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비 기자 silver_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