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연기 뿜으며 추락=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8일 중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북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기가 17일 랴오닝성에 추락해 조종사가 현장에서 숨졌다”며 “당국은 북한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일 오후 4시(한국시간)가 조금 지난 시각 중국 북동부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현 라구(拉古)향 쑹강(松崗) 마을 상공에 소형 비행기 1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이 비행기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마을 상공을 2~3바퀴 낮게 돌더니 갑자기 민가로 추락했다. 사탕수수 밭에 떨어졌다는 목격자도 있다. 폭발음은 없었다.
추락 직후 경찰과 군인이 긴급 출동해 현장을 통제했다. 추락한 기체에는 흰 천이 덮였고, 마을에는 검문소가 설치돼 주민 외에 일체 출입이 금지됐다. 소방차 2대와 경찰 차량 4~5대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 신화통신은 “조종사 1명이 현장에서 숨졌다”고 보도했으나, 추락 직전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사람을 보았다는 목격자도 있다. 홍콩의 명보(明報)도 1명이 숨지고 1명은 탈출했다고 보도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현장 사진에는, 추락한 비행기의 회색 몸체에 북한 공군의 표식인 파란 원과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을 본 한국군 당국 관계자는 “동체의 주날개 모양이나 기체 형태로 미뤄 미그-21 전투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추락 지점에서 약 160㎞ 떨어진 북한 신의주 공군기지나 내륙쪽인 평안북도 방현 기지에서 이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관계자는 “신의주 기지는 미그-16 등 훈련기와 화물기 위주로 편재돼 있다”며 “방현 기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왜 넘어 갔나=북 전투기가 비행 훈련 도중 방향 착오로 항로를 벗어나 국경을 넘어갔을 수 있지만, 탈북하려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중국으로 넘어간 뒤에도 기수를 돌리지 않고 내륙까지 날아갔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지난해 11월 화폐개혁이 실패한 이후 경제 사정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국경수비대 소속 군인들까지 탈북에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적지는 러시아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투기를 이용한 탈북은 숨겨질 수 없고, 중국에서 붙잡힌다면 즉시 송환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투기는 연료가 떨어져 불시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공군은 연료 부족으로 비행 훈련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다. 조종사 1명의 연간 비행 시간이 15~25시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발음이 없었다는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반도 정세에 파장=북한과 중국 관계에 미묘한 파장이 예상된다. 사고 전투기가 훈련 중 방향을 잃은 것인지, 망명을 하려 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중국의 대처는 크게 달라진다.
북 전투기가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북한이 공식 사과해야할 정도로 엄중한 사태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벌써 “북한 전투기가 중국 영공을 마구 넘어오는데 인민해방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며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망명을 시도한 것이라도 문제다. 이 경우 북-중 관계에는 큰 영향이 없을 수 있지만, 북한의 엘리트인 전투기 조종사가 탈북을 시도했다는 것을 중국이 공식 확인하는 것은, 북한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입증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종사가 탈북을 시도한 것으로 중국이 확인했더라도 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신화통신은 중국이 북한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다.
중국 군사전문 사이트 티쓰망(鐵血?)은 “정보당국이 급히 북한으로 요원을 보냈다”고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했다.
시점도 미묘하다. 서해와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이 군사력을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사건이 터졌다. 미 국방부는 며칠 전 북한의 유사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 전투기가 국경을 넘어 날아오는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군은 중국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고 있는데 중국 인민군은 북한의 낡은 전투기에 영공이 뚫리는 망신을 당한 셈이다.
중국 언론은 추락 사실만 간략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만큼 민감한 문제로 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