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亡)] 맥심은 왜 ‘실수’를 사과하는 데 2주가 걸렸나

[망(亡)] 맥심은 왜 ‘실수’를 사과하는 데 2주가 걸렸나

기사승인 2015-09-04 16:36:55

[쿠키뉴스=이준범 기자] 결국엔 망했다. 4일 오전 월간 맥심(MAXIM)(이하 맥심)은 사과문을 통해 “판매 중인 잡지를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고 수익금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1일 홈페이지에 2015년 9월호 표지 사진을 게재해 ‘성폭력 미화 논란’을 불러온 지 2주 만에 이뤄진 사과다. 이로써 맥심은 국내외적인 비난을 받으며 잡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동시에 수익 면에서도 손해를 입게 됐다.

맥심의 9월호 표지 사진은 문제가 많았다. 사진에서 조직폭력배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입은 배우 김병옥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검은 차에 기대어 서있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차의 트렁크가 반쯤 열린 채 테이프로 발목이 묶인 여성의 맨 다리가 밖으로 드러나 범죄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옆에는 “더 리얼 배드 가이(THE REAL BAD GUY)”라는 제목으로 “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좋아죽겠지?”라는 문구를 넣어 이성 관계에서의 나쁜 남자를 범죄자와 연결지었다.

표지 사진 뿐 아니다. 잡지의 내지에도 시체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저수지로 끌고 가거나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내밀어 위협하는 김병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손발이 묶인 채 트렁크 속에 있는 여성에게 김병옥이 손을 내미는 사진 아래에는 “선생님, 오늘 촬영은 강간범이 아니라 살인범 콘셉트입니다만”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사진이 공개된 이후 일어난 반발은 컸다. ‘2014년 맥심걸 콘테스트’ 우승자인 정두리는 지난달 21일 SNS를 통해 “맥심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시선에 대해 유감이 깊어졌다”며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남성에게 강간·살해를 당하고 있음에도 맥심은 표지 사진을 통해 폭력을 미화시켰다”는 글을 올리고 앞으로 맥심과의 촬영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에서는 “여성의 현실적인 공포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하지 말라”며 네티즌들이 맥심코리아 편집부를 향해 청원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강력 범죄와 성범죄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한국에서 오직 자신들의 상업적 이윤과 표현의 자유만을 앞세우며 강력범죄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범죄에 대해 일상적인 공포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시선을 외면하는 맥심코리아 편집부에게 9월호 판매 중단(회수) 및 공식적인 사과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청원운동에 동의 의사를 밝힌 온라인 서명자 수는 4일 오후 2시 기준 1만1000명을 돌파했다.

해외에서도 맥심을 비난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미국 뉴욕에 있는 맥심의 본사 측은 지난 3일(현지시간)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맥심 코리아가 출판한 표지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며 “우리는 이를 강하게 규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의 패션잡지 ‘코스모폴리탄 UK’도 지난 2일(현지시간) 홈페이지에 올린 장문의 글을 통해 맥심의 표지 사진을 “역대 최악의 커버(In perhaps the worst cover idea of all time)”라고 비판했다. 이어 ‘코스모폴리탄 UK’는 “잘못된 것들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 ‘나쁜 남자’와 여성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남자를 혼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스모폴리탄 UK’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은 여성 차별 지수가 높은 나라”라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언급했다. 2014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제출한 ‘세계 성평등 보고서’를 인용해 “한국의 성평등 지수는 전 세계 142개국 중 117위”라거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조사한 ‘2010년 한국 가정폭력 실태 조사’를 인용해 “2010년 한국 기혼 여성의 53.8%가 배우자 학대를 경험했고 이 중 16.7%는 신체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맥심에게는 덜 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더 일찍 사과문을 올리고 대책을 마련했다면 자사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맥심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지난달 21일 맥심의 이영비 편집장은 홈페이지에 “화보 전체의 맥락을 보면 아시겠지만 살인, 사체유기 등의 흉악 범죄를 느와르 영화적으로 연출한 것은 맞으나 성범죄적 요소는 화보 어디에도 없다”는 내용의 해명글을 사과문 대신 올렸다. 이 글에서 이 편집장은 “일부에서 우려하시듯 성범죄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한 바가 없다”며 “영화 등에서 작품의 스토리 진행과 분위기 전달을 위해 연출한 장면들처럼 이번 화보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려 넣은 범죄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 29일 맥심의 한 에디터는 공식 SNS에 “미화할 거면 소지섭을 썼겠지”라는 글을 올려 논란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해명글에 대한 반박도 뒤따랐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지난달 24일 칼럼을 통해 “영화는 스토리로 말하고 사진은 이미지로 말한다”며 “영화 속의 범죄 장면은 기승전결 스토리 안의 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만 맥심의 사진은 이미지 그 자체가 보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재근은 “따라서 영화적 표현이라는 맥심 측의 해명은 말이 안 된다”며 “성범죄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해명도 군색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여성의 맨다리에 성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비판했다.

맥심은 시작부터 끝까지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표지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난달 29일 SNS에 소지섭을 언급한 글이 올라오기까지 맥심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잘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맥심이 공식적인 사과문을 게재한 것은 본사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한 다음 날이었다. 사과문에서조차 맥심은 표지 사진을 실은 행동을 잘못이 아닌 “실수”라고 표현하거나 “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전적으로 잘못이었다”라고 밝히는 등 찜찜한 구석을 남겼다.

사건은 마무리 됐지만 변한 건 없다. 무엇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공감 대신 외국 반응에 민감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자신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이라고 믿는 빈약한 감수성은 맥심이라는 집단만 갖고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론에 떠밀려 ‘잘 모르겠지만 실수했다’며 넘어가는 일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사과하는 데 2주나 걸릴 필요는 없다. bluebell@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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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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