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응급실에서 진료 중이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환자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3주 이상의 상해를 입었다. 사건은 응급실 내 폐쇄회로(CCTV)에 모두 찍혀 사회연결망(SNS) 등을 통해 전파됐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글이 오르며 사건이 확산되고 있다.
8일 현재 익산 의사 폭행사건에 관한 청와대 국민청원 중 대표적인 청원글인 ‘감옥에 갔다와서 칼로 죽여버리겠다’는 청원 5일만에 5만8900여명의 동의자를 확보했다. 그 때문인지 보건복지부 등 익산 의료인 폭행사건과 관련된 정부 관계부처는 이례적으로 사안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빠르게 약속했다.
하지만 사건을 접한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끊이지 않는 의료기관 내 폭력사건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거리로 나선 것.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그것도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에서 폭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대한의사협회(회장 최대집, 이하 의협)를 주축으로 대한치과협회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보건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300여명(주최 측 추산 800명)은 8일 서대문경찰서 앞에서 ‘의료기관 내 폭력근절 범의료계 규탄대회’에 참석해 가해자의 강력한 처벌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규탄대회에서 최대집 의협회장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진료 중인 의사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살해협박을 벌인 일은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가해자는 현행법으로 체포됐지만, 경찰의 초동대처 미흡으로 풀려나 피해자는 2차 가해에 노출되기도 했다”며 익산 사건의 심각성을 설파했다.
이어 “비단 익산에서만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진료 중인 의사가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도 (보건의료인들은) 수많은 폭언과 막말, 폭력과 생명의 위협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있다”며 법이 없어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엄중한 대책이 마련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의료법이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등에서 의료기관 내 폭력행위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에도 경찰과 검찰은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법원은 최근 5년간 내린 판결은 징역 4개월 또는 3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데 그쳤다.
이에 이경원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는 “만약 CCTV와 SNS가 없었다면 또 소리 없이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버젓이 법률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초범이라고, 주취 상태의 심신 미약이라고 오히려 솜방망이 처벌이 계속됐다”고 힐난했다. 이후 개선을 위해 사법당국과 보건당국, 국민과 보건의료계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철수 대한치과의사협회장은 2011년 경기도 오산에서 벌어진 치과의사 살해사건과 2016년 광주에서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휘두르는 흉기에 여성 치과의사가 수차례 찔리는 살인미수사건을 언급하며 익산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벌, 정부의 특단의 조치로 다시는 폭력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연대에 나선 홍옥녀 간호조무사협회장은 의료기관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음에도 계속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 보건의료인들의 침묵과 미온적이었던 공권력 및 법 집행,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국민과 정부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아울러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보건의료인들은 분을 삼키지만 말고 의료기관에서의 폭력사건이 보건의료인 만의 문제가 아님을 국민에게 알리며, 현재 진행 중인 청와대 국민청원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거듭 강조했다.
실제 현장에 모인 300여명의 보건의료인들은 개인 휴대전화를 통해 국민청원에 동의를 표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더 이상 의료기관에서 폭력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고, 결의문의 요구사항을 함께 외쳤다.
결의문에서 보건의료인들은 ▶미흡했던 초동대처에 대한 경찰의 즉각적인 사과 ▶사법당국의 엄격한 양형 구형과 판결 ▶보건의료인에 대한 폭력 근절을 위한 지원 방안 마련 ▶보건의료인에게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가중처벌법 입법 등을 요구했다.
응급의료가 공공제라고 주장하는 정부에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응급실은 폐쇄될 수밖에 없으므로 의료기관 내 경찰 배치 혹은 청원경찰 임명을 위한 재정지원 등 정부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며 사건 방지를 위해 대국민 인식개선을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생계 등에 대한 피해보상도 함께 이뤄져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13만 의사를 비롯해 3만의 치과의사, 71만의 간호조무사 등 이날 연대의사를 밝힌 직역의 보건의료인이 모두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할 경우 100만명의 동의도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20만명의 동의를 응답요건으로 하는 국민청원에 청와대가 응답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