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군가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현실의 내가 못하는 것을 선택해 대리 만족할 수도 있고, 그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끔 도울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 순간의 직감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거나, 일부러 최악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의 선택으로 사람들에게 비난받거나 그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수록 선택의 자유는 커진다. 자유로워질수록 생각지 못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실험을 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지난해 12월 공개된 넷플릭스 인터랙티브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다. ‘밴더스내치’는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정해진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기존 영화와 달리, 이용자에게 주어진 선택지에 따라 서사의 방향과 결말이 달라지는 새로운 개념의 영화다. 결말에 도달하면 다시 과거 시점으로 이동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빠르면 40분 안에 결말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새로운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2~3시간이 넘도록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밴더스내치’를 보기 위해 의자에 앉는 마음은 무거웠다. 어떤 선택을 해야 잘 했다고 소문날까.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괜한 부담감이 양쪽 어깨를 짓눌렀다.
처음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고 했다. 먼저 감독이 원하는 방향대로 영화를 본 다음, 다른 선택지를 시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비겁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조심스럽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비겁 전략 1’은 산산조각 났다. 화면에는 인터랙티브 영화의 특징을 소개하는 문구에 이어 마우스나 리모콘, 조이스틱 등으로 선택지를 고를 준비가 됐냐는 질문이 등장했다. 화면 아래쪽에서는 ‘예’, ‘아니오’ 두 가지의 선택지가 깜박였다. 아무것도 누르지 않고 10초를 버텼다. 그랬더니 똑같은 질문이 다시 등장했다. 이래서는 영원히 영화를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 굴욕적이지만 ‘예’를 선택했다. 영화가 시작한 이후에도 선택지를 고르지 않으면 무작위로 선택되는 것 같았다. 정해진 스토리와 결말은 처음부터 없었다. 넷플릭스 놈들. 생각보다 치밀했다.
‘밴더스내치’는 1984년에 사는 미국의 10대 프로그래머 스테판 버틀러의 이야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책장에서 발견한 ‘밴더스내치’라는 게임북으로 동명의 게임을 만드는 내용이다. 스테판은 잘나가는 게임 회사인 터커 소프트를 찾아가 사장인 터커와 수석 제작자 콜린 리트먼(윌 폴터)에게 ‘밴더스내치’를 소개하며 게임화 가능성을 타진한다. ‘밴더스내치’와 스테판의 잠재력을 알아본 터커는 크리스마스 시즌 발매를 목표로 회사 직원들과 함께 제작하길 제안한다.
‘밴더스내치’를 보는 동안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엔 ‘신중한 선택’의 시간이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창작자가 의도한 방향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를 의심하고 한 번 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주인공 스테판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선택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보단 어차피 정해진 스토리로 흘러간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내키는 대로 고르는 ‘자유로운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느새 등장한 첫 번째 결말은 실망스러웠다. ‘이게 끝이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탈했다. 왜 이런 결말에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친절하게도 ‘밴더스내치’는 과거 시점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했다. 마치 내가 잘못 선택한 지점이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신기하게도 이전 선택과 이어지는 스토리로 전개됐다. 첫 번째 스토리에서 봤던 이야기들이 두 번째 스토리에서도 유효했다. 더 나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확신에 찬 선택’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수많은 결말을 보면서 놀라고 또 빠져들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스토리가 시작돼도 새로운 결말을 향해 주저 없이 나아갔다.
이미 봤던 결말을 다시 보는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 단계는 새로운 결말 찾기 게임이었다. 이전 스토리에서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잘 기억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길게 이어진 미로를 탈출하는 느낌이었다. 길을 잘못들어 이미 봤던 결말을 만나면 ‘꽝’을 뽑은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결말을 찾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창작자가 숨겨놓은 히든 엔딩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처럼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사를 쓰기 위해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던 영화 감상은 결말 찾기 게임에 과몰입한 기자를 낳았다. 더 이상 시간을 투자할 자신이 없어질 때쯤 게임을 멈췄다. 아니, 영화를 껐다.
‘밴더스내치’에서 시청자는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감상하는 목적에 따라 ‘영화’의 모습이 변하고 그걸 보는 ‘나’도 달라진다. 처음엔 그저 한 편의 영화에 불과했던 ‘밴더스내치’는 새로운 결말을 만날수록 스토리와 결말이 다른 여러 편의 영화가 된다. 그러다 ‘진짜 엔딩’을 찾아 떠나는 모험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시청자 역시 자신이 처음 보고 싶었던 결말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또 어떤 것이 더 나은 결말과 선택지인지,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친다.
‘밴더스내치’가 화려한 미디어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블랙미러’ 시리즈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밴더스내치’가 고발하는 건 작가와 감독을 얕보고 악의적인 비방을 일삼는 시청자다. 언뜻 시청자에게 스토리를 선택하고 결말을 만들어갈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청자에게 주어지는 두세 가지 선택지는 제한된 자유에 불과하다. 아무리 신중하게 선택지를 골라도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희망적이었던 도입부와 달리,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밴더스내치’는 이야기 창작에 참여한 시청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 작품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고 싶었던 시청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끝없이 추락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하기도 어렵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득한 1980년대를 배경으로 게임과 음모론, 마약 등 ‘밴더스내치’는 흥미로운 소재로 가득한 영화다. 하지만 소재와 음악, 영상미, 배우의 연기 등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결국엔 영화의 독특한 형식을 완성시키는 도구다. 지나치게 음울한 주인공과 충격을 넘어 황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대다수가 좋아할 취향은 아니다. 한 번 경험해 볼만한 영화인 건 분명하지만, 재미있으니 꼭 보라고 권하기엔 망설여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화적 완성도, 메시지, 영상미 같은 기존 영화의 기준으로 ‘밴더스내치’를 바라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최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완성도보다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가 늘어나고 있다. 생각해보면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무성영화는 사라졌고, 컬러영화의 세상에서 흑백영화는 그저 옛날 영화다. 어쩌면 ‘밴더스내치’ 같은 인터랙티브 영화가 그냥 ‘영화’로 받아들여질 날이 곧 찾아올지 모른다.
영화인지 게임인지 모를 미래의 영화를 먼저 만나볼 기회가 눈앞에 있다. 당신은 이 기회를 잡을 것인가. 모든 건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이제 신중하게 선택지를 고를 시간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