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미나리의 삶은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을 보는 듯하다. 누구든 향유할 수 있고, 약도 되는 원더풀 미나리. <미나리>를 만든 정이삭 감독은 왜 영화제목을 '미나리'로 했는지를 묻자 "미나리는 첫해는 수확이 안 나요. 다음 해부터 수확이 가능하지요. 저희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분의 삶은 매우 어려웠고, 성공을 경험하지 못했죠. 부모님과 우리 세대가 성공을 맛볼 수 있었어요. 그 희생을 기리고 싶었죠"라고 말했다.
미나리는 씨를 심으면 첫해는 성장하지 않고 주변 흙을 정화한 뒤 이듬해부터 푸르게 자란다. 영화 <미나리>에서 좋았던 대사는 "우리가 서로 구해 주자"고 하는 부부의 대화다. 힘든 일상으로 그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구원할 수 없었지만, 친정 어머니 순자(윤여정)의 사랑으로 회복되었다. 미나리처럼, 가족은 대단한 구원을 이루기는 어려울지라도. 가족은 쉬이 해체되지 않고 황량한 터에서도 삶을 이어갈 것이다.
주제를 좀 바꾸어 <미나리> 영화 이야기를 해본다. 영화가 불편하다. 성우제 캐나다사회문제연구소 소장에 의하면, 한국 이민자들은 단순노동을 직업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 이민자 중에는 어제와 내일의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을 단순노동을 꿈의 실현을 위한 중간 과정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성우제)고 한다. 영화에서 "제이콥이 50에이커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 "[아내가] 3년 후에는 부화장에 나갈 필요가 없는" 목표를 가졌듯이 한국 이민자들은 대체로 더 나은 삶을 살려는 꿈을 늘 꾸고 있다"(성우제)고 한다.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산다.
우리는 성공담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성공 이후 행복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중한 일상에 대해선 살피지 않는다. 외적 기준만으로 '위너'와 '루저'를 판정한다.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성공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성공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린다. “자주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아이들의 애정을 얻는 것, 아름다운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남에게서 좋은 장점을 발견하는 것 (…)"이라고 했다.
성공한 어느 컨설턴트가 한 휴양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는 마을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컨설턴트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더 열심히 하면 훨씬 성과가 좋을 텐데요." 나에게도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어부는 컨설턴트에게 되물었다. "성과가 좋으면 뭐가 좋은데요?" 컨설턴트는 한심한 듯 대답했다. "성과가 좋으면 돈을 많이 벌고, 돈을 많이 벌어 투자하고 벌만큼 벌면…" 어부가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 다음에는요?" 컨설턴트는 무식하다는 듯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다음에는 좋은 곳에 가서 쉬면서 사는 거지요." 어부가 말했다. "나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나도 쉬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그 어부처럼.
그리고 지난해 <기생충>에 이어 국적을 떠나 중국인 감독인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가 작품상 및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분을 휩쓸었다. <노매드랜드>는 <미나리>처럼 미국 영화사가 제작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이 연출한 작품이다. 영어로 노매드는 프랑스어로 하면 노마드이다. 노마드는 초원에서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을 뜻한다. 들뢰즈가 썼던 용어이다. 노마드의 생활 철학을 '노마디즘'이라 한다.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쓰인다.
이 노마드라는 말에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디지털 문화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도 나왔다. 자크 아탈리는 자신의 책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을 통해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고 말하였다. 노마드는, 한국 말로 하면 유목민이다. 유목과 유랑은 다르다. 유랑이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가는 거라면, 그래서 공간은 끊임없이 변이하지만 존재성은 달라지지 않는 거라면, 유목은 길 위에서 타자를 만나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농경시대 이전의 고전적 노마드(nomad, 유목민)와 달리 디지털 노마드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 등장한 새로운 종족이다. 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특정 장소에 매이지 않고 원격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남의 일 같았는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재택근무와 원격근무를 겪어보니 그게 아니다.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는 이런 현실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그가 1998년 펴낸 미래전망서 『21세기 사전』에서 노마드에 대한 설명은 “다음 세기(21세기)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아직 <노매드랜드>를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노마드는 그저 인생의 벼랑에 내몰린 이들이 아니고,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면 당당히 나에게도 도움을 달라고 요구하는 독립적인 사람들이자, 길 위에서 생활하는 노하우를 교환하고 자연 친화적 철학을 공유하는 느슨한 공동체라고 한다. 아탈리가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노마드를 꼽으면서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박애나 타인에 대한 환대 등의 덕목이다. 그에 따르면 노마드는 방랑이나 유랑이 아니라 “함께 나눈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민자와 토착민, 유목민과 정착민은 지구촌 곳곳에서 그 경계가 뒤섞이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 대한 강한 배척과 경계심도 불거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올해 아카데미상은 한국 이민자의 이야기 ‘미나리’의 한국 배우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을, 미국 노마드의 이야기 ‘노매드랜드’의 중국 출신 감독 클로이 자오에게 감독상을 안겼다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