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 내 해결해야 하는 업무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양도 늘어나요. 과중한 업무와 잦은 오버타임(추가근무)을 감당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없이 일하는 제 모습을 보는 후배 간호사들은 본인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생각하게 돼요. 많은 신규 간호사들이 선배들의 근무 상황을 보고 조기사직을 선택합니다.”
-대학병원 심장혈관중환자실에서 근무 중인 15년차 남궁선 간호사
“제때 화장실에 가고, 배가 고플 때 끼니를 챙기는 것처럼 기본적인 생리현상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근무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원래는 없었던 알레르기 질환들을 갑자기 앓게 됐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더는 일을 할 수 없어 병원을 그만뒀습니다. 간호사들끼리는 이걸 ‘탈임상’(임상 현장을 탈출함)이라고 말해요.”
-대학병원 내과병동에서 7년간 근무 후 사직한 최인경 간호사
간호사들이 ‘직업 선택권과 생존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화여대 서울병원에서 17일 진행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청년 간호사 간담회에서 전·현직 간호사들은 근무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병원에 간호사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간호사의 열악한 근무 여건은 지난 수십년간 고질적 문제로 남았지만, 그동안 뚜렷한 개선 방안은 도출되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확산 이후로는 의사 인력 부족 문제와 함께 간호사 수급의 어려움이 부각됐다. 이에 지난해 3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연숙 국민의당 의원,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간호법 제정안이 현재 법안소위에서 계류 중이다.
간호법 제정안은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내용이 골자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간호사·조산사 등 5대 의료인과 의료행위에 대한 범주를 하나의 조항에 포괄적으로 규율하고 있다. 간호법이 만들어지면, 간호사는 5대 의료인 중 단독법이 있는 유일한 직종이 된다.
간호 업무 범위 규정, 직능 갈등으로 비화
간호법은 제정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의료계 각 직능단체들의 견해차이가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 간호조무사 등을 비롯한 의료계 종사자들은 간호법이 의료인의 면허체계를 무너뜨리고 의료 현장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제정안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업무 범위에 대한 규정에서 촉발됐다. 기존 의료법은 간호사의 업무에 대해 ‘(의사의 지도 하에) 진료의 보조’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간호법 제정안은 ‘(의사의 지도 또는 처방 하에)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명시했다. 이에 다른 의료인들의 업무 범위를 간호사가 침범하거나, 간호사의 독자적인 의료행위를 허용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간호사만 단독법을 마련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지적이다. 박수현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모든 직능의 협업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지금까지 의료법 아래에 형성된 협업 체계가 유지되고 있다”며 “게다가 간호법 제정안에 담긴 간호계획 수립, 간호사 인력 수급 및 지원 방안에 대한 기본적인 규정은 이미 현행 보건의료인력지원법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간호사라는 직능만을 위한 법을 단독으로 두고 있는 국가는 OECD 38개국 중 11개국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간호조무사들은 의료기관 안팎에서 간호조무사의 역할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전동환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기획실장은 “의료법에 따라 유기적으로 형성된 규칙과 역할에 큰 혼란이 예상된다”며 “가령 간호조무사가 간호사의 보조업무만을 수행한다는 간호법 조항이 실제 현장에 적용되면, 노인요양기관이나 대형어린이집에서 근무 중인 간호조무사들은 전부 간호사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병·의원뿐 아니라 노인보호기관, 장기요양기관 등에서도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적절한 역할 분담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간호법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간호사를 시작으로 각 직능들이 단독법을 가지게 된다면 의료 서비스의 체계성을 확보하고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진호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의료계의 우려가 적지 않지만, 현행 의료법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다양한 직능을 하나의 법률로 묶어 규정하고 있어 구체성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직능에 대한 단독 법을 만든다고 해서 의료체계 전반에 중대한 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며 “오히려 간호법이 안정적으로 정착한다면, 다른 직능을 위해 현행 의료법보다 체계적이고 완성도 높은 법안을 마련하는 데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차기 정부, 간호법 밀어줄까?
정치권에서는 간호법 제정안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분위기다. 여야 대권주자들은 모두 대선을 앞두고 간호사들의 고충을 청취하고 나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간호법 제정을 주요 보건의료 정책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앞서 청년간호사 정책간담회에서 “5대 의료인 가운데 간호사는 가장 업무 강도가 세지만, 임금과 근무 조건 등은 열악한 직종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며 “신규 간호사의 사직을 막고, 간호사 근무 시간을 현행 8시간 3교대 체계에서 6시간 4교대 체계로 전환하는 등의 법률적·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지난 11일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전 국민의 보편적 건강 보장을 위한 간호법 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간호사는 의료기관 외에 지역사회에서 통합돌봄, 방문간호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현행 제도는 간호사 업무의 전문성·다양성을 담기에 부족하다”며 “제대로 된 간호법이 없이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국민들의 건강을 제대로 돌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도 간호법 제정을 도울 것을 약속했다. 그는 11일 대한간호협회를 방문해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하는 간호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간호법을) 여야3당 모두가 발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위원들과 함께 공정과 상식에 비춰 합당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게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 후보만큼 간호법 제정을 확언하지 않았지만, 이날 윤 후보는 간호사의 업무 과중 및 사직 문제를 해결할 법률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간호사들이 번 아웃으로 현장을 떠나고 있고, 최근에는 환자의 목숨을 책임 있게 감당할 수 없어 그만 둔다는 기사를 접하곤 가슴이 먹먹했다”며 “간호사 업무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뿐 아니라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원내지도부와 의원들에게 부탁 드리겠다”고 피력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