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소년심판’ 속 소년부 판사 심은석(김혜수)은 살인사건 피해자의 사진을 책상에 붙였다. 고작 만 8세에 세상을 뜬 피해자가 생전 느꼈을 공포를, 유가족이 평생 짊어져야 할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동시에 심은석은 소년 범죄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집중한다. “소년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는다”고, “온 마을이 무심하면 한 아이를 망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심은석의 분노는 소년범 개인을 향하지 않는다. 대신 아동과 청소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회를 고발한다.
“소년 범죄에 관심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시선이 편협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작품에서 심은석을 연기한 배우 김혜수는 지난 4일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문 사회면에서 강력 사건들을 접하며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감정적인 접근이 대부분이었지, 소년 범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잘 몰랐거든요.” 소년 범죄를 얘기하는 37년차 배우에게선 열띤 관심과 깊은 성찰이 느껴졌다. “소년법이 현실에 맞게 개정돼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하지만, 청소년들이 범죄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어떤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돼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소년심판’은 지방법원 소년부 판사들이 마주한 갖가지 소년 범죄를 통해 아동·청소년 보호를 방기하는 사회에게 책임을 묻는다. 소수의 소년부 판사에게 과도한 업무가 몰리지 않는지, 그 소년범을 관리·감독할 보호관찰관 수는 충분한지, 경찰은 실적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소년 범죄를 대충 끝내지 않는지, 청소년 보호 센터 운영에 공공이 충분히 개입하고 있는지, 양육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게 떠맡기진 않는지…. 신예 김민석 작가는 4년간 전국 지방법원과 소년원, 청소년 회복센터 등을 취재해 이런 질문을 각본에 녹였다. 김혜수는 “다양한 시선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대본에서 느껴졌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판사들은 소년 범죄에 엉킨 복잡다단한 실타래를 대변한다. 좌배석 판사 차태주(김무열)는 어른의 책임을 촉구하는 인물이다. 그는 유년 시절 가정폭력으로 엇나가 범죄를 저질렀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어른 덕분에 올바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년재판은 속도전”이라고 믿는 부장판사 나근희(이정은)는 허술한 시스템이 법조인의 감수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보여준다. 20명 안팎의 소년부 판사가 매년 마주하는 소년범은 약 3만명. 매일같이 이어지는 과로 탓에 소년 재판을 속도전으로 처리하면, 피해자의 회복은 요원하고 재범의 고리 또한 끊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심은석이 있다. 김혜수는 “심은석은 법관이자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최선의 판례를 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봤다. 그는 온정으로 소년범을 돌보는 차태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나근희와 끊임없이 부딪히고 때론 협력하며 소년 범죄 이면을 파고든다. 김혜수는 “판사들의 유기적인 반응을 통해 다양한 시선을 전하려고 했다”면서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판사들이 대립각을 세울 때 각자의 주장이 더욱 또렷하게 펼쳐진다. 그런 반응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시선에서 사건을 고민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촬영을 마친 지는 1년여가 지났지만, 김혜수는 여전히 ‘소년재판’ 속 대사들을 마음에 품고 있다. 작품 밖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져서다. 가령 차태주가 심은석에게 했던 “소년에게 비난은 누구나 합니다. 근데 소년에게 기회 주는 거? 판사밖에 못해요”라는 말이 그랬다. 김혜수는 “(판결로써 기회를 주는 건) 정말 판사밖에 못하는 일이지만, 그와 같은 태도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청소년은 우리의 현실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어른으로서”라는 나금희의 대사도 뇌리에 남았다. “이 작품을 완주하면서 내가 느낀 마음”이라서다.
“소년 범죄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모두가 함께 고민하길 배우와 제작진 모두 온 마음으로 바랐어요. ‘소년심판’을 계기로 여러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많은 분들이 논의에 참여하는 모습이 고무적이기도 했고요. 심은석 역할을 수행하면서 저도 많이 배웠어요. 살아온 세월에 비해 저는 아직 철이 없고 가치관과 세계관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또 인간으로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