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인 삶을 갈망하며 현실과 허상 사이를 헤매는 청년, 신모에게 학대당하다가 피 냄새에 눈을 뜬 사이코패스 살인마, 10년 간 온 몸이 결박된 채 격리병동에 감금된 초능력자…. 2018년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으로 데뷔해 영화 ‘콜’(감독 이충현),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감독 애나 릴리 아미푸르)에 출연한 배우 전종서는 그간 터질 듯한 열기로 무장한 캐릭터를 자주 연기해왔다. “안전한 궤도 바깥에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취향을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
지난달 24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 속 도쿄는 전종서가 그간 표현했던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르다. 북한에서 건너와 조폐국 강도단에 합류한 그는 교수(유지태)가 하는 말을 법처럼 따른다. 혼돈보다는 질서를 우선하고,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운다. “원작(스페인 드라마)보다 정적이고 안정된 인물이에요. ‘정제되고 강인한 톤이 좋겠다’는 감독님 말씀을 따라 연기했어요.” 최근 화상으로 만난 전종서는 도쿄를 이렇게 설명했다.
“원작 도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요. 에너제틱하고 감정적이며 솔직하죠. 제가 연기하는 도쿄가 원작과 비슷하리라고 예상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실제 제가 전작에서 보여줬던 캐릭터도 원작 속 도쿄와 비슷하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리메이크 버전 도쿄가 저 같지 않다고 느낄 때도 있었어요.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와도 달랐고요. 하지만 그런 모습을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요. 오히려 더 재밌게 여길 수도 있을 거고요.”
리메이크판 도쿄는 ‘북한 아미’다. 북한에 살지만 그룹 방탄소년단 등 남한 문화를 흠모했다. 남북이 경제 공동 구역을 개발한다는 소식에 ‘코리안 드림’을 품고 남한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쿄를 기다리는 건 자본주의의 잔인한 민낯뿐. 가진 거라곤 몸뚱이뿐인 그에게 기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때 도쿄에게 교수가 손을 내민다. 전종서는 “쉽게 상처받다가도, 나를 구원해준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순수함이 청춘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임시로 강도단 리더를 맡았을 만큼 지략과 전투력 모두 뛰어나다. 하지만 도쿄의 존재감은 원작보다 덜하다. 돌발 행동보다는 강도단과 인질을 조율하는 데 주력해서다. 거칠고 뜨거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전종서에게 이런 도쿄가 답답하지 않았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돕는 역할이에요. 개인적인 아쉬움보다는 전체 줄거리가 재밌어지는 게 더 중요했어요.” 다가오는 파트2에선 재미가 커질 거라고도 했다. “여러 감정이 치닫고 본능이 깨어나죠. 사랑, 싸움, 화해 등 모든 게 증폭돼요. 파트1은 이야기가 넓게 진행됐지만, 파트2에선 폭이 좁아져 집중력도 커질 거예요.”
한때 “미친 영화를 하고 싶다”던 전종서는 이제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고 싶다”며 시야를 넓힌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을 고른 이유도 “전작처럼 충격을 주는 작품은 아니지만 보편적이고 편안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서”라고 한다. 전종서는 연인이자 전작 ‘콜’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충현 감독의 신작 ‘발레리나’를 차기작으로 골라 전직 경호원 옥주를 연기한다. 전종서가 출연한 티빙 오리지널 ‘몸 값’과 헐리우드 진출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도 올해 하반기 공개될 전망이다.
“저는 욕심이 많고 호기심도 많아서 궁금한 건 직접 해봐야 하는 성격이에요. 덕분에 제 20대를 다양한 경험으로 채울 수 있었고요. 그동안 제 마음대로 취향대로 연기했다면, 앞으로는 대중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게서 원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요. 특별히 불리고 싶은 수식어, 지금은 없어요. 이런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세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