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민식입니…다람쥐♬” 사내가 야심차게 준비해온 자기소개에 가뜩이나 어색하던 소개팅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아연실색한 상대와 달리, 사내는 폭주기관차처럼 준비해온 개그를 쏟아낸다. “오렌지를 먹은 지가 얼마나 오래인지.” “저는 고르고 골라서 고르곤졸라 피자로 하겠습니다.” “바나나 먹으면 나한테 반하나?” 결과는 예상대로 대실패. 그래도 그는 꿋꿋하다. “중국에서 소개팅한 것도 아닌데, 왜 벌써 차이나”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썰렁한 말장난으로 소개팅 상대의 혼을 쏙 빼놓은 이는 ‘털보 사장’으로 불리는 김민식(임성재). 지난 18일 종영한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 속 우영우(박은빈)의 단골 가게인 소소주점 사장이다. 겉모습은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직원 동그라미(주현영)의 고등학교 동창인 우영우와 조용히 우정을 쌓는다. 김민식을 연기한 배우 임성재는 지난 24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나 “털보 사장은 우영우를 편견 없이 대한 사람 중 하나”라며 “나 역시 털보 같은 시선으로 우영우를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임성재는 배우 손석구가 연출한 ‘언프레임드 - 재방송’ 등 전작을 눈여겨 본 유인식 감독 제안으로 ‘우영우’ 오디션을 봤다. 촬영장에선 배우 강기영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지만, “오히려 연장자들이 더 까불었다”며 웃었다. 드라마 방영 전 촬영 대부분을 마친 터라 당시만 해도 작품이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예상하진 못했다고 한다. 다만 “‘우영우’가 좋은 드라마라는 확신은 있었다”고 했다.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과 등장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이 무척 좋았어요. 문지원 작가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애를 (소재로) 택한 까닭이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죠. 드라마를 주의 깊게 보면 아시겠지만, 등장인물들 모두 영우와 맞닥뜨린 후에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캐릭터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고 느꼈어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장은 아니잖아요. 깊어지는 것 또한 성장이죠. ‘우영우’의 인물들 모두 깊어지는 성장을 경험한 것 같아요.”
시청률 17.5%(닐슨코리아, 전국유료방송가구)로 종영한 ‘우영우’의 높은 인기 덕에 임성재를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다.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임성재는 “사인이 없는데 해달라고 하셔서 매번 다른 사인을 해드린다”며 웃었다. 그는 브라운관뿐만 아니라 스크린도 종횡 무진한다. 지난 10일 개봉한 영화 ‘헌트’(감독 이정재)에서 북한 대남공작원을 연기했고, 영화 ‘비상선언’(감독 한재림)에서는 류진석(임시완)의 테러 예고 영상을 보는 비행기 승객을 맡았다.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감독 이석훈)에선 북한의 범죄조직원으로 변신한다.
임성재는 “그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어 한꺼번에 수확물을 거둔 느낌”이라고 했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광주의 소극장에 뿌리 내렸던 그는 2017년 영화 ‘변산’(감독 이준익)을 계기로 영화·드라마에 발을 들였다. 최근 1~2년 간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개봉이 미뤄져 힘든 시간을 보냈다. “관객에게 피드백을 받지 못하니 짝사랑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우영우’는 더없이 소중하다.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켜줘서다.
“살면서 제일 잘했다고 느끼는 일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대학을 그만두고 연극을 시작한 것, 또 다른 하나는 서울에 와서 매체 연기에 도전한 거예요. 연극은 관객들 반응에 따라 감정 표현이 달라지지만 카메라 앞에선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하거든요. 감정과 이성을 자유자재로 쓰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기가 왜 좋으냐고요? 글쎄요. 연기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연기로 끝을 한 번 보고 싶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