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재벌, 밤에는 탐정. 잠입 수사를 위해 노인 변장부터 코믹 분장까지 불사한다. 그가 소화한 분장만 7가지에 이른다. ENA ‘굿잡’을 통해 변신을 감행한 배우 정일우의 이야기다. 데뷔 16년 차, 첫 도전한 장르물에 공을 잔뜩 들였다. “코믹한 장르물에 능력자들의 로맨스라니, 얼마나 재밌겠어요.” 발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애정이 가득했다.
지난 27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정일우와 만났다. 그는 28일 종영한 ‘굿잡’에서 초재벌 탐정 은선우 역을 연기했다. 극 중 은선우는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막대한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은강그룹의 회장이다. 완벽해 보이는 그에겐 아픔이 있다. 20년 전 살인사건으로 어머니를 잃고, 진범을 찾고자 비밀 탐정이 됐다. 그날 사라진 어머니의 유품이 어느 날 경매에 올라온다. 은선우는 범인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심각한 이야기지만 분위기는 유쾌하다. 사소한 부분까지 공 들인 정일우의 노력이 빛났다.
“‘굿잡’에 쏟은 시간만 거의 1년이에요.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며 느끼는 게 많았어요. 감독님과 배우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대본, 대사, 상황에 여러 변주를 줬어요. 애드리브도 많이 시도했죠. 자유롭게 변장하는 탐정 캐릭터인 만큼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싶었거든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애정을 더 많이 쏟은 것 같아요. 언제나 열심히 하지만 ‘굿잡’은 특히나 더 그래요. 연기에 영혼을 갈아 넣었거든요. 배우들끼리 호흡도 정말 좋았어요. 촬영을 마치니까 정말 헛헛하더라고요. 여운이 오래갈 것 같아요.”
정일우는 기획안을 볼 때부터 ‘굿잡’에 끌렸다. 미지의 영역으로만 느끼던 장르물에 호기심이 샘솟았다. 시트콤과 장르물을 넘나드는 분위기에 고민도 컸다. 하지만 ‘굿잡’이 품은 B급 정서에 끌렸다. “우리나라 장르물은 분위기부터 무겁잖아요. 하지만 ‘굿잡’은 달랐어요. 유쾌하고 편하게 볼 드라마가 나올 것 같아서 기대감이 생겼어요.” 전작인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거둔 성공은 기분 좋은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재미만 있으면 시청자에게 선택받는다는 확신이 커졌다. 드라마 불모지로 꼽히던 MBN ‘보쌈-운명을 훔치다’(이하 보쌈)로 성공을 거둔 뒤 자신감을 얻은 덕이다.
‘굿잡’은 회마다 다른 에피소드로 꾸며졌다. 주연 배우로서 새로운 재미를 주고 싶다는 의지가 컸다. 첫 방송부터 회자된 노인 분장은 영화 ‘미션 임파서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에서 영감을 얻은 정일우의 아이디어다. 긴 머리 가발과 수염을 붙인 히피 스타일에 도전하고 교복도 입었다. 대학교에서 졸업 작품을 찍는 기분이었단다. 정일우는 “감독님과 배우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면서 “이전까진 대본을 보고 연기만 했지만, ‘굿잡’은 모두가 함께 작품을 만든 느낌”이라고 돌아봤다.
즐거운 기억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촬영 직전 정일우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에 확진돼 일정이 2주간 멈췄다. 촬영 중간에는 오토바이 사고로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해 3주 동안 오도 가도 하지 못했다. 여러 일이 겹치며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촬영이 이번 달을 꼬박 채우고 끝났다. “12부작인데 체감 상 30부작 같다”며 웃던 정일우는 “끝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힘을 준 건 상대 배우 권유리다. 전작인 MBN ‘보쌈’에서 합을 맞춘 두 사람은 ‘굿잡’으로 1년 만에 재회했다. 정일우는 “사극과 현대극은 다르지 않나. 또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면서 “촬영을 시작하니 모든 염려가 사라졌다. 밝고 긍정적인 유리가 나를 잘 이끌어줬다. 합이 잘 맞아서 잘 어울린다는 소리도 많이 듣더라”며 흡족해했다. 일각에서 열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일우는 “좋은 동료라 그런 말도 나오는 것 같다”면서 “워낙 잘 맞는 친구다. 제안이 온다면 한 번 더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고 말했다. “저희끼리 우스갯소리로 다음엔 SF를 찍어보자고 했거든요. ‘보쌈’으로 과거, ‘굿잡’으로 현재를 경험했으니 이젠 미래로 가보자고요. 하하.”
MBC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뒀다. 부침도 겪었다. 뇌동맥류 투병으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답을 찾았다.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감사해하다보니 일이 더욱더 즐거워졌단다. 도전 의지 역시 커졌다. 요즘 정일우의 관심사는 악역이다. 그는 “기회가 오면 마흔 전에 조커처럼 강렬한 악역을 선보이고 싶다”면서 “이제 4년밖에 안 남았다”며 가볍게 웃었다. 정일우는 오는 11월 개봉을 앞둔 영화 ‘고속도로 가족’(감독 이상문)에서 기존에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선보인다. 그는 “연기는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재밌다”면서 “항상 연기에 목마르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제가 어느새 데뷔 16년 차더라고요. 지금까지 단단해졌지만, 20대 때 경험을 많이 쌓았다면 더욱더 좋은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웠어요. 그래서 30대 땐 쉬지 않고 일을 했죠.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40대에는 더 좋은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할 수 있을 때 실컷 일할 거예요.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여러 무대에서 다양한 장르로 좋은 연기를 보여드릴게요. 앞으로도 좋은 배우가 될 테니, 저를 많이 찾아주세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