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장은 직무 수행에 있어 의사 자격이 필수불가결한 자격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의사 자격이 공익 보호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 내지 특별히 우대해야 할 이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06년 9월, 201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보건소장 임용 시 의사 면허가 있는 사람을 우선 임용하도록 하는 ‘지역보건법시행령 제11조 제1항’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의사뿐만 아니라 관련 전문가 등’으로 법을 개정하라고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법안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의사를 제외한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약사 등 타 직역에서는 보건소장 우선 임용 원칙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과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는 28일 국회에서 토론회를 개최하고 법안 개정을 촉구했다.
발제를 맡은 김동수 동신대 한의대 교수에 따르면 의사 면허를 소지한 보건소장 비율은 지난 10년간 40% 내외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72.6%가 대도시나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실정이다.
민간 의료기관이나 의사가 없는 취약지는 현재 비의사 직군이 보건소장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의사가 지원하지 않는 보건소에서의 5년 이상 보건소에 근무한 타 의료직종은 △한의사 2명 △치과의사 0명 △약사 6명 △조산사 포함 간호사 54명 △의료기사 49명 △공무원 등 기타 41명 등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인권위는 보건소장의 의사 우선 임용 규정이 평등권을 위반하므로 개정을 권고했다”며 “현행 보건소장 의사 우선 임용은 평등권을 위배할 뿐만 아니라 비감염성 질환(만성질환) 중심인 보건소의 변화된 기능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간 비의사 출신이 보건소장을 맡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도 증언했다. 김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비의사 출신 보건소장 임용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고, 행정적 조치도 없었다”며 “보건소장의 의사 자격 조건이 선언적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현장에서 보건소장 임무 수행에 구체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 의료공백을 심화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다. 지역에선 1차 의료기관의 기능이 더욱 요구되는데, 의사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건소장을 공석으로 남겨둘 수 없기 때문에 해결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의사 우선 임용 조항이 지역 1차 의료기관 기능의 적임자인 의사 외 의료인의 비도시 보건 소장 임용을 방해하는 규정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약사 출신 왕영애 전 오산시보건소장도 “지자체 보건소장의 빈자리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의사 직능의 보건소장 지원율 저하에서 비롯된 지역보건의료 공백을 다양한 보건의료 직능이 메꾸고 있다”며 “의학적 전문성보다 중요한 것은 중앙정부 정책, 방역지침의 체계적 수행을 위한 지휘·감독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직역에서도 비의사 출신도 보건소장을 맡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승욱 대한치과의사협회 기획·정책이사는 “치과의사는 유독 보건소장으로 임명된 케이스가 극소수다. 현재도 258명의 보건소장 중 1명도 치과의사가 없다”며 “치과의사는 대학교육 과정 중 치아에 국한된 교육만 받은 것이 아니다. 전신질환에 대한 교육도 다양하게 받았기 때문에 치과가 보건소장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최훈화 대한간호협회 정책전문위원도 “방문간호사 2000여명이 국민건강증진법, 지역보건법 등을 근간으로 전국 보건소에서 취약계층, 독거노인, 빈곤위기 가구 등을 대상으로 방문간호 사업을 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불평등 개선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라며 “진정 국민 건강권 보호를 위한다면 보건소장은 ‘의사’만이 할 수 있다는 퇴보적 인식의 고착화를 탈피해 역량 있는 보건의료인이 보건소장으로 임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역의료 공백 상황을 절감하고 있다며 우선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겠다고 밝혔다. 곽순헌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과장은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면서 “대도시 지역에선 민간의료에서의 진료 기능이 활성화 됐기 때문에 보건소 기능이 축소돼야 하는 상황이다. 반대로 의료취약지에서는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보건소장 임명이 지연돼 의료공백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선 의료 취약지의 지자체 의견을 수렴하며 법안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