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의 새 사령탑에 정은보 전 금융감독원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국민의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그의 어깨가 무거운 상황이다.
1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거래소는 지난 14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정은보 전 금감원장을 제8대 이사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을 가결했다. 정 이사장의 임기는 오는 2027년 2월14일까지 3년이다. 정 이사장은 전날 거래소 부산 본사에 첫 출근을 시작했다.
정 이사장은 지난 1961년생으로 대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행정공시 28회에 합격해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경제분석과장,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정책관을 지낸 이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금융감독원장을 역임했다.
정 이사장은 관료 출신으로 경제·금융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물이다. 또한 김주현 금융위원장,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점이 업무 수행에 있어 장점으로 부각된다. 당초 거래소 이사장 후보 선임 과정에서도 이같은 장점이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정 이사장을 원칙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는 지난 2022년 금감원장 시절 은행권 리스크 관리와 충당금 적립, 증시 불공정거래에 대해 원칙에 입각해 엄정 조치를 취하면서 시장 안정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에 따라 거래소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당면한 과제를 원칙에 따라 풀어나갈 것으로 추정된다.
정 이사장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최근 증권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꼽힌다. 해당 프로그램은 상장사의 이사회가 스스로 기업가치 저평가 이유를 분석해 대응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투자자들에게 적극 설명·소통하는 것을 지원하는 방안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상장사의 주요 투자지표(PBR, ROE 등)를 시가총액·업종별로 비교 공시하고, 상장사에 기업가치 개선 계획 공표를 권고한다. 또한 기업 가치 개선 우수기업 지수 개발 및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등도 포함된다. 세부 시행 방안은 이르면 이달 중 발표될 예정이다.
투자업계에서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좋은 시도로 평가한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주주환원 확대 여력이 벤치마킹 사례로 꼽히는 일본과 비교해 크지 못하다는 점에서 높은 정책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지적한다.
김윤정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제조업 및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산업구조 특성상 시클리컬(경기순환적)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실적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정책에 의한 배당 확대를 하더라도 향후 주주환원 정책 지속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자사주 매입 및 처분에 대해서도,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서라기보다 기업의 사업 재원 마련을 위해 활용되는 관행적인 부분을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거래소와 금융당국의 세부안 마련 협의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확정하면, 거래소는 상장사들에 기업 가치 개선 계획 공표를 권고할 전망이다. 현재 거래소가 기업가치 개선 우수 기업으로 구성된 코리아 프리미엄 지수(가칭) 개발과 관련 ETF 도입안을 검토하는 만큼 프로그램 성공을 위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내년 출범 예정인 대체거래소(ATS)와 토큰증권(STO) 사업의 정립, 불법 공매도 근절을 위한 전산시스템 구축, 지난해 차액결제거래(CFD) 주가조작에 따른 불공정거래와 파두 사태로 촉발된 기업공개(IPO) 신뢰도 저하 등의 과제도 남아있다. 정 이사장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 이사장은 취임식에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의 성공을 위해서는 거래소가 중심을 잡고 뚝심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며 “상장기업들의 기업가치 제고계획 수립과 투자자와 활발한 소통 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면밀히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 이사장은 기업 밸류업 노력이 단기적인 호응에 끝나지 않고 중장기적인 기업 문화로 뿌리내리도록 지원할 방침을 밝혔다. 이를 위해 거래소는 관련 전담조직을 상설화하고 상장기업과 적극적으로 대화할 계획이다.
정 이사장은 “공정한 시장관리를 위해 상장심사의 전문성과 역량을 강화하고, IPO 기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며 “공매도 전산화 지원, 불법 공매도 감시 노력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 불공정거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시장감시 조직과 인력도 대폭 확충하겠다”고 첨언했다.
이창희 기자 window@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