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봄, 루벤스는 오랜 기간 후원자였던 이탈리아 만투아 공작, 빈센조 곤차가(Vincenzo Gonzaga, Duke of Mantua)의 간청으로 그가 보내는 그림 등 선물을 동맹인 스페인 왕가 부부와 왕이 총애하는 레르마 공작 돈 프란시스코(1553~1625)에게 전달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곤차가는 선물 공세를 통해 스페인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려는 야심이 있었다. 또 루벤스에게도 예술을 사랑하며 동시에 스페인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레르마 공작의 비위를 맞추는 게 중요했다.
레르마는 스페인에 도착한 루벤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이에 루벤스는 훌륭한 백마에 반갑옷을 입고 탄 레르마 공작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에 의해 스페인 기병대의 대장 겸 산티아고 기사단 부사령관으로 갓 임명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레르마 공작의 실물 크기로 대형 작품이 탄생되었다.
이 초상화는 1547년 뮐베르크에서 슈말칼텐 동맹을 상대로 한 스페인의 카를 5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 기마 초상화는 당시 유럽 궁정에 유행처럼 퍼져 있었다.
기마상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통치자의 절대 권력에 대한 상징이었으며 조각, 회화, 에칭 등의 주제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선례가 부족해 티치아노는 말을 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다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의 콜레오니와 같은 고전 및 르네상스 조각과 독일의 알프레히트 뒤러의 '기마병(기사와 죽음, 악마)'을 참고하였다.
루벤스는 자료에서 영감을 받아 17세기에 거의 이 장르를 재창조하였다. 특히 그는 스페인에서 최고로 꼽히던 우상 티치아노를 능가하고 싶었다.
레르마 공작의 요청을 받고 루벤스는 고대 그리스의 아펠레스(Apelles)가 그린 작품처럼, 갑옷으로 무장하고 관람자를 향해 돌진하는 듯한 역동적이고 용맹한 기사의 모습을 그리기로 구상하였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약한 아펠레스는 알렉산더 대왕 애첩의 초상화를 그리다 애첩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화가를 아낀 대왕은 애첩을 아펠레스에게 주었을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다.
루벤스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작은 갈기와 꼬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웅장하게 장식된 백마에 올라 의식용 화려한 갑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는 발을 등자에 단단히 고정하고, 스페인식 러프로 목을 둘렀으며, 지휘봉을 두껍고 금으로 수놓은 승마용 바지에 대고 한껏 뽐내고 있다.
또 그의 목걸이에 걸려 있는 금빛 가리비는 성 야고보를 암시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기병대 대장 겸 산티아고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레르마 공작의 위엄은 잘 표현되어 있다.
루벤스는 공작이 입은 금으로 만든 갑옷의 눈부신 반사를 특출난 기교로 나타냈는데, 이는 겨우 26살이었던 화가의 비범한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창을 든 한 무리의 기병들이 전속력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는 배경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갑옷 반사광의 처리와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듯한 구름은 그림에 극적인 요소를 더해 준다.
루벤스는 이 기념비적인 작업에 믿을 만한 조수들의 도움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혹 스페인 궁정이 조수를 제공했을 지 모르지만, 그들의 임무는 캔버스를 펴고 다듬고, 물감을 갈고 섞는 것, 그리고 다른 준비 절차들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막강한 의뢰인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루벤스는 공격 결과에 대해 관람객에게 살짝 힌트를 준다.
공작의 머리 위에 있는 가지들 중 하나는 승리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화의 상징인 야자나무이다. 열매의 무게로 아래로 구부러진 가지들은 레르마 공작이 개선문 아래에 나타난다는 인상을 준다.
루벤스는 공작과 훌륭한 백마를 표현하기 위해 신중하게 관점을 고려하였다. 우선, 공작은 기병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을 막 올라서는 참이다. 이는 관람객이 좀더 낮은 위치에서 그를 우러러보게 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루벤스는 스페인 기병대장인 레르마 공작이 전세를 파악해 작전을 지시하는 것을 표현했다.
루벤스는 이 승마 초상화의 구성을 통해 그의 개념적이고 지적인 강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붓질과 표현에 있어서도 자신의 전문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공작 갑옷의 흉판(Breastplate 胸板)을 특별히 신경을 써서 섬세하게 묘사했다. 위엄 있는 신분의 상징인 흉판은 아마도 밀라노의 갑옷 공방에서 나온 특별히 값비싼 작품이었을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나 뉘른베르크와 같은 독일 남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밀라노는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의 생산에 있어 고도로 발달된 중심지였다.
세부적인 묘사에 대해 정확하게, 루벤스는 기독교적인 요소와 신화적인 요소를 모두 보여주는 흉판에 새겨진 금박 장식용 리본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동시에 광택이 나는 금속에 무수히 반사되는 햇빛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화가다운 기교를 보여준다. 루벤스는 넓은 붓놀림으로 갑옷을 먼저 칠흑 같이 만들었다. 그렇게 한 뒤 표면의 광택을 위해 흰색 납을 발랐다. 공작의 말도 그에 못지않은 솜씨로 묘사되었다.
우리는 공작의 애마를 묘사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긴 갈기와 꼬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반짝이는 눈과 넙적한 콧구멍을 가진 이 말은 아름다움과 힘으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다빈치는 오래전부터 말에 매료되었다. 그는 강박적으로 말을 그렸고, 밀라노의 공작 스포르차를 위해 선친의 기마상을 만들 땐 말을 해부하며 비교동물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동물은 통각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식솔들을 위해서는 고기를 구입할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천재였다. 피렌체 정청의 '앙기아리 전투' 벽화를 위한 준비 그림에서 그의 코덱스(Codex, 노트) 중 밑그림용으로 스케치한 말 그림이 있다. 스케치에서 말들은 그가 그린 사람들만큼 강렬한 동작과 감정을 보여준다.
루벤스는 먼저 짙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말과 기수의 윤곽을 위한 공간을 채워, 공작이 빛의 아우라를 입고 나타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초상화에서 루벤스는 짧은 붓질로 그려진 말의 갈기부터, 거친 붓 놀림으로 그린 나무의 잎과 열매까지, 또 느슨하지만 효율적인 배경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 능력의 폭과 깊이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큰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많은 재능 있는 조수들을 고용했다. 그런 말년의 작품들과 대조적으로, 루벤스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혼자 작업했다. 그를 특징짓는 화가다운 놀라운 기교, 거대한 크기, 경이로운 구도 감각을 그림 속에 담았다.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레르마 공작의 기마 초상화’이다.
그러나 권좌에 있던 레르마 공작이 실각하고 난 뒤 이 그림은 왕실 컬렉션에 들어갔다. 후일 펠리페 4세는 이 그림을 카스티야 제독에게 하사했다. 그 후 이 작품은 1969년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 여러 귀족의 손을 거쳤다.
권력의 상징으로 권좌의 정점에서 그려진 기마 초상화의 ‘유전(流轉)’을 바라보니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의 유한함이 씁쓸하게 밀려온다. 정물화에 해골이나 촛불, 꽃 등을 그려 ‘인생의 덧없음’을 경계하는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라 한다. 그러나 나에겐 이 그림이 바니타스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