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간 이어온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탈피하고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영풍그룹과 고려아연의 갈등이 ‘지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단순히 기업 간 갈등을 넘어 산업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영풍과 함께 고려아연 공개매수를 추진하고 있는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는 지난 19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취임 이후 영풍 동의 없이 제3자 배정의 신규 발행을 추진해 사실상 공동 경영을 파기했다”며 “장형진 영풍 고문이 직접 나서면 최 씨 일가와의 싸움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저희(MBK파트너스)가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하고 고려아연을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 이번 공개매수의 배경”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13일 영풍그룹은 경영권 강화를 목적으로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 6.98%~14.61% 확보를 목표로 약 2조원 규모가량의 공개매수에 나선 바 있다. 이에 고려아연 측은 ‘적대적 M&A’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어 대립각이 심화되고 있다.
MBK파트너스는 고려아연의 재무건전성 악화,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배임 의혹, SM엔터테인먼트 시세 조종 관여 의혹, 미국 전자폐기물 리싸이클링 기업인 이그니오홀딩스 고가 매수 의혹 등을 제기하며 1대 주주인 영풍의 경영권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토대로 지난 13일에는 고려아연 회계장부 등의 열람 및 등사 청구 목적의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고려아연 측은 악의적인 일방적 의혹 제기라며 명예훼손 등 강력한 법적 조치를 예고했다. 고려아연은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배임 의혹에 대해 “풍부한 여유자금 활용을 통한 투자수익 제고의 일환으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경영판단을 거쳐 해당 사모펀드에 하는 사모펀드에 투자했다”며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련 법령 및 내규에 의해 필요한 절차를 모두 거쳤다”고 밝혔으며, SM엔터테인먼트 의혹과 관련해서는 “이미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충분히 진행됐고, 재판까지 진행 중인 사안”이라며 “당사에 대해서는 기소나 재판이 진행 중인 바가 없다”고 말했다.
또, 이그니오홀딩스와 관련해서는 “투자 당시 글로벌 초대형 투자은행(IB)의 기업가치 보고서를 토대로 적정가치를 산정한 뒤 매도인과의 협상 및 합리적인 경영판단을 거쳐 거래를 진행했다”면서 “특히 이그니오는 고려아연이 추진하는 ‘100% 리사이클링 동박’을 생산하는 자원순환 밸류체인의 핵심으로, 지난해 3만톤 수준이던 동(구리) 생산량을 2028년 15만톤까지 확대하기 위해 당사가 진행한 필수 투자였다”고 강조했다. 재무구조 상태에 대해서도 올해 6월 말 연결기준 부채비율 36%, 차입금의존도 10%로 견조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고려아연은 MBK파트너스가 중국계 자본을 등에 업은 투기 자본이라며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적대적 M&A라고 비판했다.
이에 MBK파트너스는 “자사는 2005년 설립된 국내 사모펀드로, 자사의 국내 투자활동은 국내 투자 운용역들에 의해 관리되며, 펀드에 투자한 LP(유한책임투자자)들은 투자 기업의 재산이나 기술에 접근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일각에서 제기하는 해외 기술 유출 등의 우려는 없다”면서 “이번 공개매수는 명백한 1대 주주의 경영권 강화 차원이며, 공개매수 마무리 후 훼손된 주주가치를 회복하고 매입 자사주 전량 소각, 배당 강화 등을 통해 적극적인 주주환원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갈등은 추후 민·형사 등 각종 소송전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다만 일차적으로 시장에선 고려아연 측 우호 여론이 형성되는 모양새다. 소액주주 의결권 플랫폼 ‘액트’는 “고려아연은 한국 상장사 2400개 중 지배구조와 주주 환원율에 있어 가장 우수한 수준”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고려아연 온산제련소가 위치한 울산광역시의 김두겸 시장은 이례적으로 “사모펀드의 주된 목표가 단기간 내 높은 수익률 달성이란 걸 고려하면 인수 후 연구·개발 투자 축소, 해외 매각 등이 시도될 가능성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 관계자는 “고려아연은 ‘산업의 쌀’ 역할을 하는 아연·연·동·은 등 기초 원자재를 공급하는 국가 핵심 기간산업을 영위하고 있어 단순히 기업 차원의 경영권 갈등만으로 보기 어렵다”며 “경영권 분쟁이 소모적인 방향으로 장기간 지속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 설립한 영풍그룹은 1974년 고려아연을 설립, 영풍은 장 씨 집안이, 고려아연은 최 씨 집안이 경영해 왔다. 하지만 올 초부터 영풍이 고려아연의 현금 배당을 늘리라고 지적하며 정기주주총회 등을 통해 갈등이 확산됐고, 지난 7월에는 고려아연이 영풍빌딩을 떠나 종로 그랑서울로 본사를 옮기면서 물리적으로도 독자 노선을 걷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