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④] 강병규 “SK가 선수협 포기하라고 각서까지 요구했다”

[단독 인터뷰④] 강병규 “SK가 선수협 포기하라고 각서까지 요구했다”

기사승인 2011-09-21 15:09:01
[쿠키 스포츠] 강병규는 2000년 선수협 문제로 두산 베어스 보호선수에서 제외된 후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이후 한 시즌 만에 은퇴한다. 바로 한해 전 개인 최고 성적을 거뒀지만 30살에 유니폼을 벗는다. 그는 선수협 탈퇴를 조건으로 SK 구단에게 각서를 종용받고, 선수협 결성 동지들이 “구단과 잘 좀 지내보지 그랬느냐”라는 말에 미련없이 야구를 그만 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했다.

-평범한 수준의 선발투수였지만 1999년 두산의 무너진 선발진의 희망으로 떠올라 13승9패를 거뒀다. 평균자책점은 5.21이었지만 당시는 지독한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그리고 SK로 옮긴다.

“최고 성적이기는 한데. 야구는 잘 못했다. 평범했다. 2000년 3월초로 기억한다. SK 와이번스(이하 SK)가 쌍방울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재창단했는데 각 팀에서 보호선수를 제외하고 1명씩 주기로 했다. 그런데 K 사무총장이 내가 두산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고 하면서 SK 사장을 만나보라고 하더라. 선수협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두산 쪽에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던 상황이라 ‘형이 어떻게 알아?’ 그랬더니 SK 쪽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 같다더라. 사장단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겠지.

SK 사장을 만났다. SK 사장이
K 사무총장에게 그랬단다. 강병규가 두산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는데 어디 몸이 아픈 거냐고, 운동 못하는 상황이냐고.
K 사무총장이 전혀 아니라고. 13승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직접 만나보라고 한 모양이다. SK 사장과 만나니 SK는 돈도 많고 지원도 잘해주겠다고 하더라. 무엇보다 선수협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잘못된 제도가 많으니 두산에서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면 SK를 와 달라고 하더라. 연봉은 2억을 준다고 했다. 연봉도 마음에 들었지만 선수협을 지지한다는 말이 너무 고마웠다. 두산에서 버린 날 데리고 가려는 SK에 대한 호감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게 마지막 프로시즌이었다. 2000년 방출됐다.

“연봉 2억원을 준다고 하더니 1억원에 옵션 계약을 맺자고 하더라. 나는 난리를 쳤다. 당시 구단 사장이면 곧 법이다. 사장이 한 말을 지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뭐라는지 아나? 당시 SK가 프로야구 판에 처음 들어와서 연봉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한 소리였다는 거다. 기가 막혔다. SK가 이동통신사니까 CF로 연봉을 보전해준다고 하더라. 불합리한 연봉계약 구조 때문에 선수협도 만들었던 나다. 하지만 그냥 사인했다. 화가 나지만 그냥 사인했다. 왜인지 아나?”

-그게 궁금하다. 곧 바로 유니폼을 벗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선수협 대변인으로 연봉계약 갖고 나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선수협 이미지가 나빠지니까. 다른 가난한 2군 선수들도 있고 한데 이런 일로 또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계약했다. SK 사장이 1군 복귀하려면 빨리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떤 지원을 바라는지 물었다. 그래서 ‘투수들은 더운 곳에서 훈련하면 1달 걸릴 거 보름이면 몸을 만들 수 있다. 전지훈련을 못 갔으니 더운 곳에서 재활을 좀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나.

“SK 사장이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K 감독과 코치들이 선수협 대변인이면 대변인이지, 특별대우해주지 말라고 했다더라. 기가 막혔다. 내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다. 구단이 몸 빨리 만들라고 도와주겠다고 해서 재활에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했더니 이렇게 나온 거다. 그렇게 그냥 인천에서 몸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객지 생활이라 많이 힘들었다.”

-성적이 고작 2승에 그쳤다. 억대 연봉 받는 선수 치고는 초라한 성적이다.

“할 말이 없다. 컨디션이 형편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한 부분이 있다. 내가 선수협 대변인으로 특별대우를 요청했다, 등판 거부를 했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등의 소문이다.”

-햇빛 알레르기라는 소문도 있었나.

“구단 트레이너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K 감독이 무조건 운동장에 나오라고 했다고 하더라. 시즌 중 K 감독을 찾아갔다. 지금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으니 제발 몸을 만들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으니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진단서를 떼어 오라고 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아예 내 말을 거짓말로 알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반 병원 두 곳을 갔다. 한 곳에서는 지금 컨디션 자체가 최악이라고 했고, 한 곳에서는 열꽃과 반점이 심하니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런데 구단에서는 후자만 언급하며 ‘야구 선수가 피부 좀 안 좋다고 훈련을 못하겠다고 한다. 저 자식이 저런 놈’이라고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냥 어깨가 아프다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한마디로 SK 1년은 악몽이다.”

-만약 당시 겨울에 선수협 활동을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몸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리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다. SK는 신생 팀이라 전력 자체도 약했고. 타선 지원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다만 정상적으로 전지훈련 가고 했다면 시즌 로테이션 한 축 정도는 맡지 않았겠나.”

-결국 시즌 후 방출된다. 당시 30살이었다.

“SK 사장과 8월에 다시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앞으로 선수협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다. 너무 화가 나서 심하게 따졌다. 선수협을 적극 지지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냐고. SK 사장은 그럼 너 때문에 내가 맨날 KBO 이사회 나가서 스트레스 받아야겠느냐고 했다. 다른 구단 사장들이 강병규 하나 못 자르냐고 놀리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선수협의 ‘선’자만 꺼내도 넌 자를 거라면서 각서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기가 다른 구단 사장들에게 ‘강병규, 선수협 못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다고 했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이상한 약속을 하고 온 거다.

선수협과 야구 중 선택하라고 하더라. 테이블 치고, 악쓰고 별 짓을 다했다. 절대 각서 못 쓴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구단 운영팀에서 연락 와서 유니폼 반납하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10살 때 야구공을 잡은 뒤 20년 만에 야구를 그만 둔다고 생각하니 정말 너무 슬펐다. 그래도 선수협을 포기하라는 각서는 쓸 수 없었다. 그래도 SK 사장이 고마운 부분은 날 방출시키는 이유를 설명해줬다는 점이다. 그냥 방출했으면 2승 밖에 못 거둬서 날 잘랐나, 무슨 꿍꿍이가 있나 생각했겠지만 선수협 때문이라고 정확히 알려줬다.”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나.

“아무 말씀 없으셨다. 나도 신문 보고 내가 방출된 걸 알았는데. 부모님도 뉴스 보고 아셨다. 그냥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네가 원해서 야구했고, 네가 다 잘해서 프로 갔으니 알아서 잘하라고 하셨다.”

-선수협을 함께 결성한 양준혁과 K 사무총장 등은 아무 말 없었나.

“곧바로 전화가 왔다. 지켜주겠다고. 야구 꼭 다시 해야 하니 몸 관리 잘하고 있으라고.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믿었다. 겨울에 함께 그 고생을 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선수협 총회한다고 해서 나갔더니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저 사람이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지 아닌지 그게 보이더라. 양준혁은 ‘구단하고 잘 좀 지내지 그랬냐’라고 했다. 구단하고 끝까지 싸우자던 사람이 그랬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 이후로 만나지 않았다.”

-다른 팀의 영입 제안도 없었나.

“없었다. 언론에서 강병규 죽이기 담합이 8개 구단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기사를 쓸 정도였다. 날 좋게 봐주시던 모 구단 단장이 한 번 전화로 몸 잘 만들고 있으라고 말을 건넸지만 이후 전화가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포츠서울 이종남 국장이라고 정말 유명한 야구 기자가 계셨는데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야구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기사도 써주시고 했는데 나중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8개 구단 모두 영입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강 선수가 싸움에서 진 것 같다고 했다. 뭐 각오하고 있었다. 애써 주신 분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나이 서른에 그렇게 야구를 그만두니 막막했겠다.

“막막하기도 했지만 뭐 자신감은 있었다. 선수협 만든 것 후회하지 않았고. 뭐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각오는 했지만 현실로 닥치니 혼란스럽기는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당당히 살자고 다짐했다. 그러다가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CP에게 전화가 왔다. ‘출발 드림팀’ 때 알게 된 분이다. 야구 정말 안 하느냐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게 됐다고 했더니 선수 시절 받는 연봉에는 안 되지만 한 번 방송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강호동, 그룹 핑클과 함께 99초 안에 광고 찍는 코너로 데뷔했다. 그것도 3개월 시한부였다. 여론이 안 좋아도 3개월은 진행하겠지만 계속 심해지면 3개월만 하고 그만 둘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면 된다.”

-두산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지 않았나. 우승도 경험하고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맞다. 당시 팬들이 두산에서 날 버린다고 시위도 벌여주고 했다. 고마운 분들이다. 아직도 OB의 등번호 1번, 두산의 등번호 1번 수식어가 제일 좋다. 방송도 하고 했지만 야구할 때가 제일 좋았다.”

-어떤 야구선수로 남고 싶었나. 지금이라도 당시 두산 투수 강병규 팬들에게 할 말이 있나.

“고맙고 미안하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리 뛰어난 투수도 아니었는데 너무나 많은 박수를 받았다. 두산은 전통적인 강팀이고 팀 컬러가 끈끈하니 팬들도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다. 야구인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다면 두 가지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난 현역 시절 최고 구속이 140㎞ 초반이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140㎞를 던질 때 160㎞를 던진다고 최면을 걸면서 던졌다. 그래야 타자를 이길 수 있다. 잘은 못했는데 자신감은 있던 투수로, 또 성남고 고3 시절 6연속 완투를 했었는데 패기 있던 선수로 기억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
조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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