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주의 과일값에는 충분히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식사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과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민감하다. 전반적으로 과일 가격이 육지보다는 비싸다고 하며 아내는 구입을 망설이곤 한다. 그래도 제주에 있기 때문에 쉽게 접하는 과일 한두 가지는 늘 장바구니에 포함시키는 편이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귤 역시 한동안은 살던 곳보다 비쌌다. 아내도 귤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제주에선 적어도 귤은 마음 놓고 집어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던 차에 세화오일장에서 과일 파는 총각이 맛보라며 건넨 황금향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 새로운 품종의 귤 값 역시 꽤 비싼 편이었는데 아내는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비싸지만 맛이 있으니 비싼 것 아니라는 아내의 말에 옳다고 인정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우연히 알게 된 황금향 직거래 귤 농장을 방문했다. 아내가 지갑을 또 한 번 통 크게 열었다. 맛 차이는 없지만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혹은 못생겨서 정상적인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한다는 황금향을 보고는 한껏 욕심을 냈다. 냉장고 냉장실을 가득 채우고 나머지는 종이 상자에 넣어 놓고는 부지런히, 조금도 아끼지 않고 식탁에 푸짐하게 올린다. 그런데, 이 황금향이라는 품종 정말 맛있다. 지금까지 내게는 제주도 최고의 과일이다.
인제대학교백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몇 해 뒤에 지하철을 이용한 출퇴근 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인천의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던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서울로 데려왔다. 두 살 터울의 둘째는 보살필 방법이 없으니 부모님 집에서 더 지내기로 했다. 말 그대로 끼니 굶어가며 3형제를 키운 어머니와 아버지는 쉴 새도 없이 다시 그 아들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한 달쯤 전에 서울의 집으로 데려왔다. 이웃의 아이들도 사귀어야 하고 주변 지리도 익혀야 하고, 아파트 열쇠 사용법도 가르쳐야 했다. 낮에 혼자 집에 남아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사전 훈련이 필요했다.
아이를 데려오고 첫 번째 한 일은 만일의 경우 아이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옆집에 동갑의 아이가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입구의 경비실에는 물론 아파트 단지 앞의 빵집과 문방구를 비롯해 이런 저런 가게에 저녁마다 아이와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며 아이를 알렸다. 혹시 급히 진료 받아야 할 일 생기면 연락하라며 명함도 잊지 않고 전달했다. 특히, 빵집과 문방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들렀다. 때때로 경비실과 옆집에 전달하고 남은 빵은 다음날 아이가 먹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은 늘 아이를 지켜보았던 고마운 이웃이었다.
그날 성읍민속마을에 도착해 스마트폰을 꺼내 마을이 아니라 북쪽의 오름을 먼저 검색했다.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산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사전에 이것저것 알아보지 않고 현장에서 샅샅이 살피고 사진으로 남겨 나중에 찾아보는 터라 성읍민속마을에 오면서 이 마을을 굽어보는 저 영주산까지 돌아볼 생각은 아예 없었다.
[발해(渤海) 동쪽에서 수억만 리 떨어진 곳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3만 리이다. 여기엔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樓閣)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이곳엔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인(仙人)들이 산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 (三神山)만 남았다고 한다./출처: 두산백과]
사기(史記) 열자(列子)에 있는 삼신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삼신산의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다. 우리의 귀에 익은 산 이름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도 삼신산이 있다. 금강산을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이라 불렀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영주산(瀛洲山)이 바로 한라산이다.
한라산 자락의 작은 오름을 산으로 칭하는 것만도 특별한데 아예 한라산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영주산은 높이 176 미터의 평범한 오름이며 분화구는 동쪽으로 터져 있어 오름의 모양이 말발굽처럼 생겼다. 오름 서쪽의 비탈이 심한 부분은 삼나무와 소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나머지는 경사가 완만한 초지여서 소 방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차장이 넓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찾는 이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주차에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화장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영주산 걷기는 소가 넘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계단을 타고 넘어 들어가며 시작한다. 밧줄 울타리의 계단을 따라 가면 그 끝에 작은 시멘트 벙커가 있다. 추측해 보니 소 관리하다 갑자기 비라도 오면 잠시 피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인 듯하다. 그 안에는 누군가 이런 저런 그래피티 작업을 해 두었다.
소들이 여름내 풀을 뜯은 탓인지 가시가 있는 작은 나무들을 제외하고 모든 풀은 잔디를 깎은 듯 짧다. 가시엉겅퀴, 꽃향유, 이질풀, 쑥부쟁이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가을꽃이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반복적으로 소가 뜯어 먹으니 꽃 피울 기회를 번번이 놓치다가 소들이 뜸할 때에 번개처럼 꽃을 피운 듯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소똥만 아니라면 초지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 같아서 발 딛는 느낌이 좋다.
낮게 누운 꽃과 풀밭을 느끼며 두 번째 언덕까지 오르면 비로소 시야가 넓어진다. 북쪽의 오름들이 멀리 보이고 동쪽으로는 풍력발전기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크게 보인다. 남쪽을 보면 수평선이 훌쩍 올라와 있다. 이곳의 나무계단은 마치 하늘에 올라서는 느낌의 사진을 연출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산책로는 서쪽을 향해 완만하게 오른다. 한라산 정상부가 조금씩 올라온다. 철 지난 당잔대와 가시엉겅퀴 그리고 꽃향유 꽃의 키가 커졌다고 생각할 즈음 산불감시초소에 이른다. 영주산의 정상인 산불감시초소에서 비로소 서쪽으로 수많은 오름을 품에 않고 있는 한라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성읍민속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안내표지판에서 영주산 지명에 관한 애매한 설명을 읽는다. [신선이 살아 영모루라 불리다 한자로 영지 (靈旨)로 표기되다가 발음이 비슷한 영주로 정착되었다]고 해설을 해두었다. 변천 과정에 대해 참 애매하게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주산을 영모루오름이라 부르고 있으니 바른 해설인지는 알 수 없다. 한자표기를 하려다 보니 조금은 억지스러운 이유를 끌어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길은 이내 내리막이고 잠시 후 갈림길 표지판이 보인다. 왼쪽 길은 주차장이고 오른쪽 길은 영주산 둘레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어느 쪽으로 가든 울창한 숲길이다. 둘레길로 접어들었는데 급경사로다. 산책로를 ㄹ 자 형으로 내었지만 방향이 바뀔 때마다 경사가 매우 급해 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경사로와 씨름하며 걷다보니 소나무 숲이 어느새 삼나무 숲으로 바뀌고 곧 숲이 끝난다.
그 아래 양지바른 곳에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어느 오름을 가든 비슷하다. 다니다 보니 좋은 자리 찾아 오름 높은 곳에 묘를 쓰고는 돌아보지 않아 나무와 풀이 무성해 돌담이 아니면 누구도 거기 무덤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이곳 오름 아래 누운 분들은 그나마 소박한 분들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적 이 오름에서 뛰어놀고 어른이 되어서는 이 오름에서 농사짓고 가축 키우다 늙어 다시 오름으로 돌아간 분들이다.
숲 가장자리로 넓은 평지에 억새가 무성한데 그 사이로 푸른 잎의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문득 보니 차나무다. 철 늦은 차나무꽃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누군가 심기만 하고 가꾸지 않아 차나무는 대부분 머리 위로 훌쩍 자라 올랐다.
차나무 밭을 벗어나니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다. 그 길 끝에서 저수지를 만난다. 농어촌 공사에서 200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16년 12월에 공사를 마친 이 성읍저수지의 저수용량은 125만 제곱미터다. 바라보니 저수지라기보다는 커다란 호수로 보인다. 그 둘레가 2.5 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 물이 지하로 스며들거나 흘러나가지 않도록 가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듯하다.
저수지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너무 황량해 보여 걷기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 나와 영주산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출발한 주차장까지는 계속 목초지를 걷는다. 삼나무가 울타리 역할을 하며 초지를 분할해 두었다. 이 삼나무 울타리를 몇 번 지나는 동안 볼 것이라고는 길가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꽃뿐이어서 꽃에 관심이 없다면 조금은 지루한 길이다.
삼신산 중의 하나라는 내용을 읽고 걷기 시작한 영주산은 걷기를 끝내고 나서도 그 모양새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정상에서 보는 사방의 경치만 해도 꼭 한 번은 올라야 할 오름이다. 그러나 풀이 한참 자라는 계절에는 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 때문에 걷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