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지영의 기자 = 주가조작은 입증이 매우 까다롭다. 작전세력의 매매 동향과 자금의 출처,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면밀히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주가조작 중에서도 유독 적발이 어려운 유형이 있다. 바로 외국 자본의 탈을 쓰고 국내에 들어오는 ‘검은 머리 외국인’ 수법이다.
증시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은 실제로는 한국인이지만, 서류상으로만 외국 국적으로 꾸며 투자하는 이들이다. 통상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그 국가 국적으로 국내에 투자하는 방식을 쓴다.
국내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이 주가조작을 하다 처음 적발된 사례는 지난 2002년이다. 국내 투자자 2명은 홍콩에 투자자문사로 등록한 뒤 국내증시에서 외국인 행세를 했다. 코스닥기업들에 대해 3804회에 거쳐 고가주문을 내는 방식으로 주가를 올려 수십억대 부당이득을 챙겼다. 수천회의 시세조종 시도에도 적발되지 않았던 이들이 덜미가 잡힌 것은 삼성전자에 대해 1700억원대 미수사고를 일으키면서다. 해당 사고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다른 종목에 대해 시세조종을 벌인 혐의가 포착됐다. 이후 홍콩 현지조사를 거쳐 이들이 외국계 기관을 가장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 개입돼 시세조종을 했다는 의심사례가 종종 발생하지만, 위 사례처럼 검거된 경우는 드물다. 지난 2016년 코스닥 상장사 코데즈컴바인의 주가가 9거래일만에 2만원에서 15만원대로 폭등했을 때도 검은 머리 외국인의 조작 의혹이 무성히 일었다. 외국계 소수계좌에서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이면서 시세가 폭등한 정황이 나왔지만 조사 결과에서 특정한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빈도가 적어서 적발되는 건수가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잡기가 어려워서 적은 것”이라며 “검은 머리 외국인들의 주가조작은 실제로 빈번하게 벌어진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상 내부자 고발이 없으면 잡아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말 기준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상장주식 보유액은 842조3000억원(시가총액의 29.9%)에 달한다. 특히 국내 주식을 많이 보유한 국가 중에서는 룩셈부르크(58조원), 케이맨제도(15조원) 등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두 국가는 다양한 세금감면 제도가 있어 세율이 극히 낮은 수준에 속한다. 대표적인 조세 회피처로 꼽히는 곳이다. 특히 룩셈부르크의 경우 지난해 기준 실효세율은 0.7%에 그쳤다. 이처럼 실효세율이 낮은 국가들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투자수익을 챙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케이만제도도 유럽연합(EU)으로부터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이밖에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는 버진아일랜드, 파나마, 버뮤다, 라부안(말레이시아), 모리셔스, 키프로스, 스위스, 마셜군도, 바베이도스 등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같은 조세 회피처의 투자금 중에 상당액이 주가조작을 시도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 있다고 본다. 국내에서 주가조작을 통해 올린 투자 소득을 조세 회피처로 옮겨 세금을 내지 않고 온전히 가로채는 것이다. 흔히 의심사례로 거론되는 것은 코데즈컴바인 사례처럼 코스닥 중소형주에 외국인 매수세가 몰리는 경우다. 사실상 외국인들이 국내 코스닥 기업의 정보를 획득할 가능성이 높지 않기에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통상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를 두었거나, 외국계 증권사를 통해 주문을 넣어 외국 매수세인양 가장하는 방식을 쓰는 검은 머리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스닥 기업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들에 외국인 매수세가 갑자기 몰리는 경우들이 있다. 이 경우 보통은 시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신호로 해석한다”며 “투자자들이 추종매매했다가 대규모 투자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크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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