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 황준하 감독 “간호사에게 들은 태움, 알려야 했어요” [태움 전염되다②]

‘인플루엔자’ 황준하 감독 “간호사에게 들은 태움, 알려야 했어요” [태움 전염되다②]

기사승인 2022-08-30 06:01:02
영화 ‘인플루엔자’를 연출한 황준하 감독.   사진=박효상 기자

영화 ‘인플루엔자’(황준하 감독)는 폭력을 전시하고 고발하지 않는다. 선배 간호사의 끔찍한 괴롭힘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 속에 존재하는 폭력의 그림자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비춘다. 모두가 폭력의 피해자였고, 피해자는 곧 가해자가 될 것을 암시한다. 관객을 폭력의 목격자 자리에 놓고, 스스로 원인을 찾게 한다. 간호사 태움은 어떻게 전염되는가. 왜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된 ‘인플루엔자’는 황준하 감독의 데뷔작이다. 오래전부터 전염병과 우리 사회 사이의 공통점을 생각하던 황 감독은 2019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태움에 주목했다. 대학교 워크숍에서 쓴 대본을 태움 이야기로 수정하고, 단편으로 계획한 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했다. 영화가 개봉하기 하루 전인 지난 24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황 감독은 “지금도 간호사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감독과 나눈 태움과 영화 제작 과정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 ‘인플루엔자’는 언제, 어떻게 시작한 영화인가요.

“2015년 서울에서 메르스 사태가 벌어졌어요. 사람들이 다 마스크를 쓰고 다녔죠. 전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전남 광주시에 살았거든요. 서울로 시험을 보러 가서 마스크를 쓴 기이한 풍경을 관찰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염병이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와 비슷한 것 같더라고요. 대학교에 가서 1학년 전공 수업에서 처음 쓴 시나리오가 ‘인플루엔자’였어요. 그땐 태움이 아니라 영화과 학생들이 시골 마을에 가서 전염병에 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건 찍을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넣어뒀다가, 나중에 복학해서 그 제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2019년에 태움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왔거든요. 태움을 다룬 작품을 이전에 했던 생각들과 같이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고 화면비가 달라지는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인플루엔자’는 단편으로 준비했던 영화예요. 스무살 때부터 빨리 장편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대학생이 무슨 장편이냐는 시선이 있었어요. 그걸 깨고 싶어서 이야기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 경제적으로 이야기를 늘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과거 장면은 병원에 있는 인물들이 좁은 프레임에 갇혀서 오가는 모습을 구현하려고 4:3 비율로 했어요. 현재 장면은 인물들의 거리감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로가 긴 화면비로 했고요.”

영화 ‘인플루엔자’ 스틸컷

- 다솔(김다솔)이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를 듣는 장면이 나와요. 엔딩곡으로도 나오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두 가지가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저항의 의미가 있어요. 2016년 이화여대에서 시위를 할 때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 게 인상 깊었거든요. 두 번째는 극 중 다솔과 은비(추선우)가 병원이 아닌 다른 곳, 다른 세계에서 다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의미를 담았어요. 관객들이 노래 제목과 가사를 청각적으로 들으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야기 정서에 맞아떨어지는 사운드는 재미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음악이 정서를 강화해주기도 하지만 비틀어서 의미를 유추하는 기능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하라고 하면 못 넣을 것 같아요. 연출자의 개입이 너무 들어간 느낌도 들어서요.”
 

- 태움에 대해 취재한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간호사는 전문 직업군이잖아요. 주변에 간호사가 없으니 취재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처음엔 도서관에 가서 간호 관련 책을 다 빌렸어요. 익숙해져야겠다 싶어서 용어부터 밑줄 치면서 공부했죠. 그러다가 SNS에서 대나무숲 같은 익명 커뮤니티를 봤어요. 거기에 태움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많이 올라왔어요. 어느 학교에 재학 중인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누구누구인데 메시지를 달라고 댓글을 달았어요. 그렇게 10명 정도와 이야기를 했어요.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기도 했고, 익명 채팅이나 이메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 태움 사례를 직접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첫 번째는 아직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스무살 때 촛불집회를 나간 세대거든요. 그 이후 2~3년 동안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도 이럴 수 있구나 싶었어요. 두 번째는 열악한 간호환경에 대해 생각했어요. 사람을 쥐어짜는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거죠.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걸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제가 작품을 할 때 직접 해보는 편이라 하다못해 병원에서 응급실에서 일해보려고 했어요. 그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시작됐고, 호흡기가 안 좋은 가족과 살아서 병원에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만약 병원에서 한 달만 일했으면 영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을 한 번씩 해요.”
 
영화 ‘인플루엔자’를 연출한 황준하 감독.   사진=박효상 기자

- 영화에서 태움을 전염병에 비유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태움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열악한 근무환경이라고 생각해요. 병동이 빠르게 움직이는 바쁜 상황, 그리고 인력 부족, 이 두 가지가 전제 조건이죠. 이 두 가지를 충족하려고 전염병이 일어난 상황으로 설정했어요. 그래서 도심보다 한적한 소도시로 설정했고요. 사실 판토마 바이러스라는 전염병 설정은 맥거핀처럼 영화에 자세히 나오지 않아요. 판토마라는 외피보다 내부를 봐달라는 거죠. 헌신하는 간호사가 왜 쓰러지고, 왜 사직서를 내고, 왜 사직을 할 수 없고, 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지를요. 영화 속 바이러스를 코로나19로 해야 하나 생각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인류는 앞으로 계속 다른 질병을 겪을 것이고, 그럼 굳이 코로나19로 바꿀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코로나19로 보이지만, 5년 뒤엔 그때 유행하는 질병에 대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언제, 어떻게 영화감독을 시작했는지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진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중학교 때 친구와 연극을 했어요. 청소년 극단에 가서 공연도 하고 연극도 배웠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원동력 같아요. 제가 영화를 처음 시작한 10년 전에 비해 지금은 영화의 미디어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해요. TV도 그렇고요. 그에 대해 많이 고민해요. 디지털 미디어 전시에 작가로도 참여했고요.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인플루엔자’를 볼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영화가 불편할 수 있어요. 영화적 표현에 영향받지 마시고, 왜 이 사람들이 변해가는지를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해답을 내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구성이에요. 영화 속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주시면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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