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산악회의 울릉도 학술조사보고전람회가 10일부터 18일까지 동화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 전람회는 산악회 보도반의 보도 사진을 비롯하여 동물, 식물, 광물, 농림 관계 표본 등이 전시된다. 또 석기 시대 이래의 고고학 민속학 자료와 의학반 등의 조사 결과 등 다양한 종합 전시로 꾸며 울릉도와 독도의 전모를 보여주리라 한다. (출전 경향신문)
□ 해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대한제국 고종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제정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 민간단체 독도수호대가 제정했다.
위 기사는 1947년 8월 18일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의 전신)가 조직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일주일 간 두 섬을 조사한 결과를 종합해 국민에게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동화백화점은 지금의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일제강점기 미즈꼬시백화점이었다.
당시 독도 방문은 마치 시베리아 캄차카반도를 탐험하는 만큼이나 어려웠다. 행사를 주관한 조선산악회는 송석하(민속학자) 석주명(나비학자) 등이 이끌었고 국어학자 방종현, 고고학자 김원용, 한학자 임창순 등 63명으로 구성됐다.
이 조사단이 꾸려진 것은 1947년 4월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 하던 우리 어민이 일본 어선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면서였다.
이마저도 고립된 울릉도·독도였던지라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해 6월 20일 ‘대구시보’가 ‘왜적일인 얼빠진 수작-소도(小島=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어구(漁區)로 소유’라고 보도했고 이를 중앙일간지가 받아쓰면서 여론화됐다.
정치싸움에 바빴던 남북한의 과도정부는 요즘 말로 독도 주권에 대해 ‘1도’ 관심 없었는데 조선산악회가 국토규명 운동에 나서자 남한 과도정부가 선박과 호위 등을 지원하여 격려한 것이다.
정치권이 이렇게 부랴부랴 나선 데는 배경이 있다.
1947년 7월 11일 패전국 일본에 대한 관리를 맡은 극동위원회는 ‘일본의 주권은 혼슈, 북해도, 큐슈, 시코쿠의 제도와 금후 결정될 수 있는 주위의 제 소도에 한정될 것’이라는 대일 기본정책을 발표했다. 1945년 9월 5일 일본을 점령한 주한 미군이 ‘대일방침’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 북해도, 큐슈, 시코쿠에 한 한다’는 것과 달라졌다.
‘주위의 제소도(諸 小島)’ 즉 ‘큰 섬 주위의 모든 작은 섬’이라는 얘기로 달라진 것인데 일본이 이를 적용해 독도 소유 야심을 드러냈던 때라 우리 과도 정부는 조선산악회 등 국민 여론에 밀려 민정장관 안재홍 등이 나서 학술조사단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국사관 관장 신석호,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 등 공무원이 합류시켰다.
그런데 조선산악회 등 민간이 한 일을 마치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학술조사를 시킨 것으로 뒤바꿔 버렸다. 여론에 등떠밀려 놓고서 말이다.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 활동도 조선산악회의 독도 탐사 건과 비슷하다.
이 학술조사단은 1947년 8월 20일 울릉도 도동항에서 대전환(大田丸)호를 타고 독도에 도착해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해방 직후라 일본 이름의 배 ‘대전환’호를 타고 들어간 것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날 날씨가 더없이 좋아 입도에 성공해 조사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조사단은 독도 동도에 ‘조선 울릉도 남면 독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대 기념’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리는 최초의 시설물이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