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정작 이들 부부의 현실적 고민은 따로 있었다. 북쪽 평양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한 콜레라가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한양 도성 안에서도 매일 수백 명이 죽거나 성 밖으로 격리됐다. 조선 정부의 방역 체계는 성 밖에 병막을 짓고 환자에게 곡식 몇 줌 쥐어준 후 방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 버려지면 백성들은 무당의 권유로 병을 일으키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달래는 것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히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적 개념의 방역 법규와 방역위원회가 제정됐다. 이때 조선 정부 방역 책임자가 의사 에비슨(1860~1956·제중원 2대 원장)이었다. 서양 의학 수용과 함께 ‘위생’이란 개념이 처음으로 쓰였다.
“여보,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도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조선의 환자 치료에만 몰두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아들을 잃어요. 제발요.”
드루 부인은 남편에게 호소했다.
앞서 부부는 1894년 1월 고향 버지니아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배에 오른 뒤 2개월의 긴 항해 끝에 목적지 조선 제물포에 닿았다. 그러나 그해 3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면서 임지인 호남 지방으로 갈 수가 없었다. 드루는 서울 정동에서 먼저 나와 있던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비슨 등과 교류하면서 호남 의료 사역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동학농민 봉기에 청나라와 일제가 개입해 한반도를 그들의 전장으로 삼으면서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고 재산과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유랑걸식했다. 게다가 평양의 일본군 진영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많은 사람이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죽었다.
이때 드루는 서울 서소문 거처에서 제중원(현 서울 을지로입구 하나금융그룹 터)으로 출근하며 콜레라 환자 치료에 전력했다. 콜레라 환자뿐만 아니라 농민 봉기로 다친 부상자들로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부상자들은 전염병 환자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없다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역병 귀신’이 자신에게 씌울까 병원을 탈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의사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미 북장로회 조선 평양스테이션으로 파송된 의사 윌리엄 홀(1860~1894)이 환자와 전쟁 부상병 등을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드루의 아들이 태어날 무렵 그의 유해가 한양 도성 밖 양화진에 안장됐다.
“드루 선생님, 산모의 건강과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당장 진료를 그만 두고 깊은 산 속에서 이 여름 한 철을 보내시고 나중 합류하십시오.”
“원장님 그럴 수 없습니다. 콜레라 기세가 도성만이 아니라 계속 남하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 다녀온 군산과 전주 광주 순천 일대에서도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이건 방역위원장으로서 명령입니다. 조선에 들어온 의사 모두가 홀처럼 순직하면 되겠습니까.”
에비슨이 드루에게 휴식을 권했다.
드루는 그때 의료 사역지 호남 스테이션을 개척하지도 못하고 한양에서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렇다고 병마에 신음하는 조선 민중을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는 선교사 전킨(1865~1908)과 함께 서소문에 구제소를 마련했다. 전킨의 집 방 두 칸을 진료실 삼아 하루 10~20명의 환자를 돌봤다. 1894~1895년 몇 개월 동안 800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왕진을 통해 1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왕진은 고관대작 환자였다.
그 사이 드루와 전킨은 호남 의료 사역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주막 봉놋방 숙소는 빈대와 벼룩 투성이었고, 열기(구들)로 잠을 잘 수 없는 고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선 방역위원회가 제작한 위생 수칙을 고을 현감 등에게 나눠주며 계몽에 힘썼다. 드루의 주머니에는 수술용 칼과 알약이 늘 있었다. 특히 드루는 군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서해안과 금강 낀 고을 진료에 힘썼다.
그해 여름. 드루는 삼막사에서 조선식 백일잔치를 벌였다. 주지 승려가 서양 아이 백일잔치를 축하해 주었고 무병장수를 기원해 줬다. 드루는 ‘떡케이크’를 돌렸다. 그 무렵 레이놀즈 선교사 부인이 아팠고, 전킨의 장남 조지가 풍토병으로 죽은 후여서 이 삼막사 잔치는 더욱 뜻이 깊었다.
“하지만 우리는 삼막사 아름다운 산속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콜레라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내 사명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의약품만 지원해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의무를 계속할 겁니다.”(드루 의료 사역 보고 중)
그러한 노력으로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됐다. 드루와 전킨은 1896년 군산스테이션을 개척해 구암병원을 세우고 의료 사역을 계속했다. 1896~1897년 총 4000명의 환자를 돌봤다. 드루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의사’로 불렸다.
하지만 1901년 드루는 풍토병으로 건강을 잃고 본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귀국 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살며 샌프란시스코 항만 검역관으로 일했다. 어느 날 미국 입국 비자도 없이 끌려가는 조선인 청년 부부를 목격하게 된다. 드루는 그 청년 부부의 신원 보증을 서고 구출해 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 부부였다. 드루는 그렇게 조선을 잊지 않고 재미 독립운동가 등을 돌보다 한 평생을 마쳤다.
전정희 쿠키뉴스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