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아빠' 살면서 가장 잘한 일...설마 귀농?

'어쩌다 아빠' 살면서 가장 잘한 일...설마 귀농?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15)
"남아공에 가서 진실화해위 사례 연구하겠습니다"..."갑자기?"

기사승인 2022-12-05 09:34:00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제일 잘 한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공무원 할 때 국비유학 시험에 응시한 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 것 말고는 달리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잘 했다고 내 세울 만한 일이 없다.

공무원 할 때는 맨 날 동료, 친구, 후배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돌았고 공무원 그만 두고도 식구들 챙기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사업을 해 보니까 알겠다. 내가 좋아서 만든 물건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야 팔린다는 것을. 결국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팔리지도 않을 물건을 만들어 온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미국에 사는 동안 주말이면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이러고 놀았다.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지금은 28살이다. 사진=임송

정부 청사가 과천에 있던 시절, 건물 마다 1층 구석에 흡연실이 있었다. 흡연실 안에 앉아 있으면 건물 밖이 훤히 보였다. 하루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건물 밖에서 허리 라인이 멋없이 불룩하고 낡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왜 그 볼 품 없는 두툼한 허리에서 가장으로서의 신뢰 같은 것이 느껴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돈 버느라 자신을 꾸미는 따위의 여유가 없다는 표지로 혹은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식구들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완고하면서도 단단한 고집 같은 것이 그 굵은 허리에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당시 내 허리는 상대적으로 날렵했는데 그런 내 허리가 부끄러웠다. 그 이미지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 유학 준비 과정은 꽤나 드라마틱하다.

젊은 시절 나는 연례행사처럼 매년 공무원 대상 국비유학 시험에 응시했다. 공무원 생활이 답답하기도 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색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경험을 선사해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시험 준비는 열심히 하지 않고 매년 응시만 했으니 그런 기회가 쉽게 올 리가 없었다.

그 해에도 나는 속으로 아이들에게 코끼리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심정으로 남아프리가공화국을 염두에 두고 당시 시험주관 기관이었던 행정자치부에 문의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근무할 때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만델라 대통령의 진실화해위원회 사례를 연구하겠다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을 한참 듣고 있던 행자부 담당자 왈, “지금까지 공무원이 아프리카로 유학 간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어요. 일단 동남아시아 권역으로 신청해 보세요.” 공무원 유학시험은 권역별로 나누어 선발하는데 아프리카는 별도 권역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으니 일단 동남아시아 권역으로 신청하라는 것. 담당자 말대로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이 지원서는 결국 우리 가족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2년간 생활할 수 있게 해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겠다고 지원했는데 어떻게 미국으로 가게 되었느냐고?

이 과정은 꽤나 흥미진진하지만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동남아시아로 지원서를 냈는데 인권위에 미국 유학 지원자가 없어 미국으로 바꿨고, 타 부처(민주평통 사무처) 공무원과 경쟁해야 하는데 타 부처 공무원까지 지원하지 않아 단독으로 시험을 보게 된 것.

그 당시 공무원 사회에서의 미국 유학 인기를 감안할 때 인권위와 민주평통 사무처에서 동시에 지원자가 없었다는 것은 소위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학교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유펜(UPENN)으로 정해지게 된 경위도 극적이다. 유펜 이전에 몇몇 학교로부터 어학시험(토플) 성적을 정해진 기한 내 제출하는 조건으로 조건부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그런데 어학시험 성적이 잘 안 나와 몇 차례 시험을 봐야했고 간신히 시험성적을 받았을 때는 이미 정해진 기한이 경과해 입학이 취소되었다.

더구나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학생을 모집하는 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미국 유학의 기회가 날아가게 된 상황.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유펜의 학생 추가모집 공고였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결국 입학허가서를 얻어냈다.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했던가.

그때까지 나는 그다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남들보다 고생을 더 해야 간신히 남들을 따라갈까 말까 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나를 비껴갔던 행운까지 한꺼번에 몰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운 좋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아이들에게 코끼리라도 보게 해주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미국 아이비리그 학교 유학으로까지 연결되었으니 인생이라는 것이 참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남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했다. 필라델피아에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집구하는 일부터 아이들 학교 입학시키는 것, 차사는 것, 운전면허 따는 것 까지 모두 스스로 해결했다. 집을 구하기까지 두 달 이상이 걸렸는데 그 때까지는 모텔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졸업식날 가족사진. 옆에 쇠로 된 아저씨는 유펜대학교 설립자인 벤자민 플랭클린. 사진=임송

사실 영어도 서툰 사람들이 이 과정을 스스로 해 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인터넷 연결을 위해 식구 4명이 전화기에 둘러 앉아 “이 사람 뭐라고 하는 거냐?”고 서로 의견을 모으던 모습이.

글을 쓰면서 아내와 미국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린 결론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우리 식구들에게 즐겁기만 한 시간들은 아니었다. 낯 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찌 재미있기만 했겠는가. 하지만 우리 식구들 각자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아마 이후 농촌으로의 이주도 미국에서의 경험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말 안통하고 낯설고 물선 곳에서도 살았는데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이 무슨 큰 일이겠나 싶었다.

식구들과 미국에 다녀온 생각을 하면,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다”는 속담이 자꾸 생각난다.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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