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바꿔달라는 목소리가 높다. 10년 전 산부인과 의료계가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된 문제다. 산부인과는 되고, 여성의학과는 안 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14일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변경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올라온 지 열흘 만에 3만여명의 참여를 이끌었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병을 다룬다는 뜻의 '산부인과' 명칭이 청소년과 미혼 여성들의 병원 출입을 막고있다는 지적이다.
청원인은 "산부인과는 한자풀이와는 다르게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여성질환을 모두 담당하며 산부인과의 진료와 의약적 치료가 필요한 모든 여성은 산부(임신-출생 후) 상태가 아니며 모두가 부인(기혼)이 아니다"라며 "부인병이란 이름으로 청소년들과 미혼/반혼여성, 이혼여성, 노인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임산부만 산부인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진찰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하거나 또는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와 분할하라"고 촉구했다.
산부인과 진료의자를 일컫는 '굴욕의자'의 멸칭(경멸하여 일컬음)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기성 여성들이 굴욕의자라고 혐오할수록 정작 진료가 필요한 청소년들과 미혼&반혼여성들은 더더욱 산부인과 진료를 기피한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변경하고 여성질환 인식개선 캠페인으로 국민들의 인식개선이 된다면 병원의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득이 있는 것은 자명하다"며 "인식 개선으로 여성의학과 방문률 증가는 여성과 여성의학과 종사자들 모두에게 큰 이익으로 함께할것"이라고 했다.
◇산부인과 의료계, 10년 전 '여성의학과' 변경 추진...지금은?
산부인과 의료계는 그동안 산부인과의 명칭을 변경하는 안에 대해 고민을 거듭해왔다. 산부인과에 대한 여성들의 심리적 문턱을 낮추자는 의도에서다. 10년 뒤인 지금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미혼 여성들에게 산부인과 문턱이 여전히 높다는 반증이다.
산부인과 의료계는 대체로 '여성의학과' 변경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직선제)는 "과거보다 성관계 시기가 빨라져 생식기 질환 등의 노출이 많아졌고, 이미 청소년 대상으로 자궁경부암 국가예방접종이 시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산부인과에 대한 시선 때문에 젊은 여성들의 조기발견이 늦어진다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명칭 변경 문제는 10년 전 추진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포기상태였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굴욕의자라는 표현은 심각하게 악의적인 표현이라는데 공감한다. 환부를 살피기 위한 정당한 의료행위를 펌하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히려 생명의자라고 봐야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산부인과 의료계는 지난 2012년 대한산부인과학회 주도로 '여성의학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한 바 있다. 이듬해 의사회와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검토했지만 보건복지부 승인과 의료법 개정 문턱 등을 넘지 못해 결국 무산됐다. 진료과목명을 변경하려면 의학회와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고 의료법 등 관련법도 손질해야 한다.
2012년 당시 학회가 산부인과 전문의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5%가 명칭 변경안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68%는 '여성의학과'라는 명칭을 선호했고, 나머지는 '여성건강의학과'를 선호한다고 응답했었다.
이후 2014년에는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여성의학과' 변경 의지를 알리고자 의사회 이름을 '대한여성의학의사회'와 병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유야무야된 상황이다. 현재 일부 산부인과 의료기관은 여성의학센터나 여성의학연구소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 청와대 국민청원과 관련해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아직 학회 차원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산부인과 만성 경영난도 연관...이해관계 풀기 어렵네
진료과목 명칭 변경의 이면에는 국민 인식개선 말고도 자체적인 진료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의도도 녹아있다. 과거 소아과가 소아청소년과로 이름을 바꾸면서 청소년으로 진료 대상을 확대한 것과 같은 선상이다
산부인과가 여성의학과로 개명한다는 것은 산과 및 부인과 진료를 넘어 여성과 관련된 모든 질환을 두루 다뤄보겠다는 의미다. 저출산 추세와 낮은 수가 등으로 인한 산부인과의 만성적인 경영난과도 연관되어 있다. 산부인과 경영난을 극복할 방안으로 거론되는 이유다.
모든 여성 관련 질환에는 비만, 당뇨와 같은 내과 질환과 필러 시술 등 피부미용 관련 진료 등 다양한 진료분야가 포함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명칭 개명에 동의하지 않는 일부에서는 산부인과학에 대한 전문성 약화를 우려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타 진료과의 입장에서 진료영역 침범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가 크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간선제) 법제이사는 "산부인과는 특성상 환자 당 진료시간이 오래걸릴 수밖에 없다. 저출산뿐만 아니라 수가는 현저히 낮은 수준이고 동일한 진료 안에서도 에피소드당 1건의 수가만 인정하는 등 어려움이 크다. 여성의학과 명칭 변경에는 기본 진료만 해서는 경영이 힘드니 산부인과들이 비만, 미용 등 비급여 분야로 진료영역을 확대를 꾀하고자 하는 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성의학과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하면 내과, 소아청소년과, 피부과 등 타과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고, 이를 풀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명칭변경보다 산부인과 살리기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의료계의 명칭 변경 시도는 다른 진료과에서도 있었다. 지난 2017년에는 비뇨기과가 비뇨의학과로 진료과목 이름을 바꿨다. 남성을 연상시키는 '비뇨기'가 아닌 비뇨질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이다. 2011년엔 정신과가 정신건강의학과로, 2007년엔 소아과가 소아청소년과로 개명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