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 이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지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해 1년여간 투병생활을 했다. 그는 건강악화로 자신의 사재를 출연해 세운 아주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했었다. 김 전 회장은 평소 뜻에 따라 연명 치료는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당시 명문 학교인 경기중과 경기고를 나왔다. 이후 연세대 상대를 졸업하고 31살 때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이후 현대그룹에 이어 자산 규모 국내 2위의 기업집단을 일궈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세계 경영’의 기치를 내걸고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대우를 크게 성장시켰다. 1998년 대우그룹의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한국 수출액 1323억달러의 14%에 달했다.
그는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국외지사를 설립했고, 1975년에는 종합상사 시대를 열었다. 당시 김 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82년부터 1990년대까지 대우그룹은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한 그룹화의 길을 걸었다.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한 뒤 짧은 시간에 경영정상화를 일궈 한국 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1998년 대우그룹의 자산총액은 76조원이 넘었고, 매출은 91조원에 달했다. 1999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과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기록했다.
본인의 어록을 제목으로 한 에세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1989년 출간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리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1983년 국제상업회의소에서 3년마다 수여하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했다.
성공가도를 걷던 그의 ‘대우신화’는 외환위기의 여파에 무너졌다. 1998년 당시 대우차와 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외환위기로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당시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결국 그룹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에서 머물며 마지막 봉사라 여기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김 전 회장을 포함한 300여명의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매해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해왔다.
김 전회장의 장례는 가족장이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녀 김선정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와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임중권 기자 im918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