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막하혈종으로 뇌 수술을 받고 통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었던 그는 갑작스런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켰고, 이미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브라질의 펠레와 더불어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마라도나는 1980년대 세계 축구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이다.
165㎝로 작은 신장이지만 단단한 몸에 화려한 드리블, 위력적인 왼발 킥으로 그라운드를 평정했다.
16세였던 197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라는 팀에서 프로 데뷔전을 가진 그는 4년 동안 100골을 터뜨렸고, 1981년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다.
1년 후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었고, 나폴리(이탈리아), 세비야(스페인) 등을 거쳤다.
특히 나폴리에서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나폴리 유니폼을 입었는데 .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두 차례 우승을 이끌었고, 유럽축구연맹(UEFA)컵(현 유로파리그)과 코파 이탈리아(FA컵)를 들어올렸다. 나폴리는 마라도나가 팀을 떠난 뒤 그가 달았떤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클럽 커리어에서 총 588경기에 출전해 312골을 기록했다.
국가대표에서도 마라도나의 활약은 대단했다.
마라도나는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면서 국민적 영웅이 됐다. 당시 마라도나는 8강전 잉글랜드와 대결에서 팀원의 크로스를 손으로 골을 넣었다. 당시 주심은 정상적인 헤더로 인정했고 이 사건은 '신의 손' 사건이라며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 마라도나는 "내 머리와 신의 손이 함께 만든 골"이라고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기행이 많아 그라운드의 악동으로도 불렸다. 1994년 미국월드컵 도중 도핑 테스트에 걸려 하차했고, 1997년 은퇴 이후에는 마약,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자주 구설에 올랐다.
마라도나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한국과 월드컵에서 두 차례 만났는데, 우승을 차지한 멕시코월드컵에선 선수로,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선 감독으로 나서 태극전사들과 대결을 펼쳤다.
특히 선수로 만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허 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마라도나의 전담 마크맨으로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상적인 수비로 막기 어렵다는 판단에 다소 거친 플레이가 이어졌지만 마라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축구 전설의 별세 소식에 아르헨티나와 전 세계 축구계가 슬픔에 빠졌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브라질 펠레는 "분명히 언젠가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라고 애도했고 고인이 몸 담았던 팀 나폴리도 작별을 전했다.
이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앞서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도 마련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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