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외상 전담전문의들은 죽음 가까이 있는 환자를 삶으로 되돌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는 항상 병원과 구치소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김남렬 고대구로병원 응급중환자외상외과 교수)
필수의료를 하려는 젊은 의사가 줄어들고 있다. 기존에 있던 의사마저 포기한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적자가 이어지면서 생명을 지키는 최전선이 무너지고 있다. 의료진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환자를 소송 부담 없이 최선을 다해 치료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명옥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하고 대한외과학회와 대한외상학회가 공동 주관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과 의료사고 안전망 확충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4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직 전공의, 외상외과 교수는 전공의와 필수의료 의사들의 의료소송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응급·중증외상 환자를 주로 보는 김남렬 교수는 “펠로우 때 의료소송에 대한 압박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어느 사건을 기점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다”며 그 시작은 2017년 이대목동병원에서 발생한 신생아중환자실(NICU) 사망 사건이라고 지목했다. 지난 2017년 12월 NICU에 입원해 있던 신생아 4명이 집단 사망한 이 사건으로 의사 4명과 간호사 3명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 중 일부는 구속됐다. 이후 5년을 끌은 재판에서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은 의료진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접한 필수의료 의사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과실로 인해 형사기소 돼 구속 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며 사명감을 상실한다”며 “실제 업무상 과실치사로 인한 의사 기소 건수는 해외 선진국들과 비교해 높은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2018년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의사는 877명이다. 반면 일본은 한국보다 의사 수가 3배 더 많지만 기소된 의사는 37명에 불과했다. 영국의 경우 의사 수가 한국의 1.5배 수준이지만 그해 기소된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김 교수는 “효과가 좋은 치료 방법이 있더라도 리스크가 크다면 의료진 누구도 그 치료법을 선택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피해는 환자들에게 돌아간다”면서 “필수의료를 하면 매일 죽음을 접하게 되고 항상 리스크를 안고 살아야 한다. 선의와 이타적인 노력에 기반하는 의료행위를 교통사고 사망·상해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의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면책 특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선의의 의료행위에 대한 명확한 법적 평가가 이뤄지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선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며 의료계의 자정 노력도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공의들도 의료소송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전공의는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으면서 교육받을 권리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중증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의료소송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제도적인 보호 장치가 전무해 과도한 책임을 떠안고 있다”고 했다.
전공의는 근로자이면서 동시에 피교육생(수련의)이라는 이중 신분 보유자다. 전공의는 인턴으로 1년간 여러 진료과를 돌며 경험하고, 이후 전문 과목을 정해 레지던트로 3~4년간 수련한다. 박 대표는 “전공의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다”라며 “대한민국 의료를 책임질 미래인 만큼 지금이라도 전공의들이 제대로 수련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의료진과 환자 모두가 안전한 의료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의료소송이 잦은 과목일수록 수련 기피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의료체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서울대병원 전공의들도 의료소송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5년차 응급의학과 전공의 21명 중 12명이 수련 과정에서 의료소송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
박 대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련병원이 법적 책임을 분담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경우 2007~2016년 수술 분과 전공의와 연관된 의료소송 750건 가운데 85%는 병원이 기소됐고, 전공의가 기소된 건은 18%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현 상태에선 수련환경이든 의료사고 안전망이든 실질적인 개선을 이뤄내기 힘들다”라며 “지금까지 병원이 전공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론 전공의에게 어떻게 수련 기회를 줘서 미래 의료를 살릴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해야 한다”고 짚었다.
허윤정 단국대병원 외상외과 교수는 전공의가 피교육자라는 점에서 의료사고의 책임을 온전히 떠안는 것은 부당하다며 의료사고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수련교육의 양과 질 향상, 민·형사 책임 경감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공의가 연루된 의료 분쟁은 최근 늘어나는 추세인데 전공의들이 이를 개인적 시간과 비용을 들여 스스로 방어하고 있단 설명이다.
허 교수는 “타국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형사기소율과 상한 없는 민사 배상액 때문에 전공의는 언제든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가진 채 의료 현장에 방치돼 있고, 이를 막아주기 위한 의료사고 예방과 법률 지원에 대한 법적 조항은 전공의 특별법에 포함돼 있지 않다”면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채 관리 사각지대에서 의료행위를 하도록 내몰린 전공의가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정부 측은 “의료사고 특성을 고려한 제도 개선 노력이 미진했던 점이 지금의 필수의료 위기 상황을 낳은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면서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책임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하고 있는 비율이 전체 의료기관 중 30%에 그치고 있다며 의료기관 책임보험 가입 의무화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강준 보건복지부 의료개혁총괄과장은 “책임보험 가입 의무화가 규제적 요소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개인이 부담해야 할 책임이 기관의 책임으로 전환되고, 필수 분야에 대해선 특별히 배상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며 “과감한 재정 지원과 함께 공적 배상 체계를 구체화 하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