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침체, 물가 상승, 고령화 등 복합 위기 속에서 건강보험 재정이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의정갈등 장기화에 따른 의료공백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건보 재정이 소진된 상황에서 재정 건전성을 담보해야 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고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12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보건의료계 1년 살림살이를 결정짓는 ‘2026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 협상’(수가협상)이 지난 9일 합동 간담회를 시작으로 막을 올린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협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건보공단은 서민 경제 부담과 재정 확보를 명분으로 수가 인상에 신중한 입장을 고수할 전망이다. 이에 맞서 의약단체들은 진료비 현실화와 인플레이션 반영을 요구하며 강경한 전략을 예고했다.
‘수가’로 불리는 요양급여비용은 보건의료 서비스에 대해 건강보험 당국이 지불하는 대가다.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1년씩 계약이 이뤄지며, 매년 5월31일까지 체결해야 한다. 해마다 내는 건강보험료는 수가협상 결과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다. 국민으로부터 거둔 건강보험료로 의료 공급자에게 수가를 지급하기 때문에 재정을 책임지는 건보공단으로선 수가협상이 한 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최근 수가 평균 인상률은 2021년 1.99%, 2022년 2.09%, 2023년 1.98%, 2024년 1.96%다. 건보공단은 오는 15일부터 의약단체와 본격적인 협상 절차에 돌입한다.
건보공단 관계자가 “올해 수가협상은 역대급이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번 협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지역·필수의료의 위기가 저수가 때문이라며 수가 인상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고, 대한병원협회(병협)는 전공의 집단 이탈에 따른 인력난과 고정비 상승 문제를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대한약사회와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는 각각 의약품 수급 불안정과 한방 진료 수요 증가를 들며 실질적인 보상 확대를 요구할 예정이다. 또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는 동네 치과들의 폐업 문제 등을 제시하면서 재정 지원을 피력할 방침이다.
이성규 병협 회장은 9일 간담회에서 “1년 이상 지속된 전공의 이탈로 환자와 보호자의 진료 이용 불편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적정 인력 배치가 어려웠고, 간호 인력의 업무 부담이 증가했다”며 “국민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병원이 기능을 정비하고, 지역 간 균형 잡힌 의료 공급망을 유지·확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화에 재정 축소 불가피…내년 적자 예상
최근 3년간 건보 재정 수지는 흑자를 보였지만, 중장기 재정 전망은 밝지 않다. 고물가, 고금리로 인한 국민 보험료 부담 등을 고려해 건보료율은 직장 가입자 기준 7.09%로 2년 연속 동결된 상태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라 생산 가능 인구는 감소하고,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며 건보료 수입 기반도 약화되는 양상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70세 이상 노인의 총인구 대비 비중은 2023년 11.9%에서 2050년 32.2%, 2070년 40.7%로 늘어난다. 45년 뒤에는 인구 10명 중 4명이 70세 이상인 셈이다.
노인은 생애주기 중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는 계층으로 꼽힌다. 건강보험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지출한 진료비는 48조9011억원으로 전체 진료비 110조8029억원의 약 44.1%를 차지했다. 노인 1인당 연평균 진료비는 544만3000원으로 전체 건강보험 적용 인구 1인당 연평균 진료비 215만5000원보다 2.5배 높은 수준이다. 노인 인구 증가는 건강보험 급여비 상승과도 연결된다. 최근 5년간(2019~2023년) 전체 진료비가 6.5% 증가하는 동안 노인 진료비는 8.1% 늘며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최근 10년간(2014~2023년) 65세 이상 노년층의 연평균 급여비 증가율은 10.5%로, 14세 이하 유년층(4.6%)과 15~64세 노동연령층(6.8%)보다 높았다.
노년층이 차지하는 급여비 비중은 2070년에 78.8%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김준현 건강정책참여연구소장은 지난 9일 열린 ‘노인의료비 국가책임제 시행방안’ 국회 토론회에서 “인구 구조 변화로 건강보험 재정 운영도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라며 “정부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노인 의료비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불안 요인을 해소하고, 노인 의료 안전망을 구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건강보험은 4년 연속 흑자를 달성하며 30조원에 이르는 안정적 재정 운영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건보 재정 축소는 불가피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에 따르면, 건강보험 당기수지는 2026년에 3000억원 적자를 기록하고, 2028년에는 적자폭이 1조8000억원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NABO)는 이보다 더 어두운 예측을 내놓았다. NABO는 ‘2023~2032 건강보험 재정 전망’을 통해 2025년 건강보험 당기수지는 -3조2000억원, 2028년엔 적립금이 소진되면서 누적수지가 -5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봤다. 적자폭은 계속 커져 2032년에는 당기수지 -20조원, 누적수지 -61조6000억원으로 예상했다. 2023년 기준 적립금 누적액은 건강보험이 27조9977억원, 장기요양보험은 4조1699억원이다.
건보공단, ‘안정적 재정 운영’ 사활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비상진료체계 운영은 재정 확보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의료대란을 막기 위해 이미 많은 건보 재정이 들어간 상태다. 지난해 정부는 비상진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건보 재정 1조4000억원을 투입했다. 향후 5년간 필수의료를 강화하면서 재정 10조원을 지원할 계획인데, 재정 보전 방식의 고민 없이 투자만 이뤄진다면 건보 곳간은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건보 당국의 올해 최우선 과제는 ‘안정적 재정 관리’다. 이를 위해 재정 지출 효율화와 적정 진료·검사 감시 강화, 이른바 ‘사무장병원’으로 불리는 불법 개설기관 행정 조사 및 거짓·부당청구 적발 등을 통해 재정 확보에 나서고 있다. 건보공단은 대선 정국에서 경제 상황과 서민 부담을 고려하며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합당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수가협상을 이끌어나갈 계획이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비상진료체계 지원에 이어 필수의료 정책 추진에 따른 대규모 건보 재정 투입이 지난해부터 진행되고 있어 재정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재정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하면서 필수의료 중심으로 수가를 합리적으로 조성하고, 의료 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의료 행위는 합당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