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대선 시기였던 지난해 10월 열린 국내 산업계 콘퍼런스에서 한 발제자가 내년을 전망하며 남긴 말이다. 과장이 아니었다. 몇 달 사이, 세계는 우리가 익숙했던 국제 통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다.
미국은 자유주의 질서를 수호하던 초강대국의 외피를 벗고, 보호무역주의를 넘어 자국우선주의로 세계 각국에 새로운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 중국은 여기에 저가 공세와 핵심 광물을 무기로 맞서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세와 친환경 규제를 무역장벽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충돌도 이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란-이스라엘 분쟁까지 겹치며 국제 유가는 또다시 요동쳤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빈국’ 한국에게 이러한 흐름은 특히 가혹하다.
물론 한국은 자원 위기를 수차례 넘겨왔다. 2021년 발생한 차량용 요소수 대란 이후 정부는 베트남·중국·일본에 국한돼 있던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국내 요소수 생산기업에 지원을 늘려 2023년 90%에 육박했던 중국 수입 비중을 지난해 30% 밑으로 낮췄다. 역시 중국에 의존해 왔던 리튬·코발트 등 핵심광물의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 지난해부터 아프리카 50여 개국과 광물협정 및 협의체를 가동, 수입선을 넓히고 있다.
석유 수급 문제는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계 전반에 걸쳐있는 데다 수입처 또한 한정돼 있어 이전 사례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1991년 걸프전, 2005년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2011년 리비아 사태, 2022년 러-우 전쟁 등 앞서 다섯 차례의 석유 수급 위기에서도 국제 공조, 비축유 관리 등을 통해 나름대로 잘 대처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대응’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통상 환경 자체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게임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가 개막하면서 ‘컴퓨팅 능력’이라는 새로운 자원이 세계 패권을 결정짓는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AI는 현시점 전 세계를 최첨단 AI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컴퓨팅 파워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로 양분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규모와 AI 시스템 수준이 글로벌 통상 및 경제는 물론, 국가 간 새로운 의존 관계를 만들며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중국·EU 등 강대국을 차치하고도 우리나라의 AI 데이터센터 확장세는 인도·일본에 비해서도 더딘 상태다. 반도체 인프라라는 좋은 자원을 가졌음에도 또다시 다른 나라에 뒤처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빌리 레돈비르타 옥스퍼드대 교수는 “AI 시대의 석유는 컴퓨팅 능력이며, 이 자원을 가진 국가가 미래의 패권을 쥘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자원빈국이다. 석유도 없고, 희토류도 없다. 앞으로도 물리적인 자원의 발굴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반도체가 있고,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할 능력이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이번엔 단순한 자원 부족이 아니라 국가 생존 경쟁에서의 낙오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디지털 자원을 시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각성이다. 그동안의 규모와는 차원이 다른 뉴노멀 수준의 AI투자가 단행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