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5)] ‘When I Fall In Love’, 캘리포니아의 잠 못 이루는 밤
좋은 것에 이유가 없듯 싫은 것에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싫어하는 마음보다 무관심이 더 무섭다. 내게 멀리 떠나는 여행은 늘 동쪽을 향해 있었다. 가고 또 가고, 다시 선택해도 유럽이었다. 다니다 보니 익숙해졌고 여행을 한다면 이번에도 유럽, 특히나 금방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래놓고 몇 년이나 훌쩍 지나 보낸 파리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뉴욕 보다는 파리가, 라스베가스 보다는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이 더 맘에 들었다. 화려한 것 보다는 차분한 걸 좋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리라.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관심이 없었다. 굳이 누가 묻지 않으면 말 할 일도 없지만 미국에 가본 적 없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너 영문과잖아.’ 라며. 그러면 나는 또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런던은 몇 번 가봤어.’ 혹은 ‘셰익스피어는 영국 사람이잖아.’ 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는 좋아하면서.
그는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 노래를 불렀지만 한번도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미국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일 때문에 미국에 가는 일도 잦았다. 그동안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TV나 영화에서 봤다면 그를 만난 뒤로는 그에게서 들었다. 미지의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창구. 그는 그 커다란 땅 중에서도 캘리포니아를 좋아했고 나중에 캘리포니아에서 살 거라고 했다. 처음으로 미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곧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흘렀고 우린 헤어졌다. 관계가 소원해질 즈음부터 미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프게 이별을 하고 천천히 마음을 주워 담고 그 마음이 온전해지자 미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네가 아니어도 된다.
사람도 일도 장소도 다 인연이 있다. 때가 되어야 만나진다. 서두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서른이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니 참 계획 없이 살아왔다. 꿈만 있었다. 꿈만 보고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였고 실패였다. 해가 바뀔 무렵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일 년치 계획. 불가능하지도, 작심삼일로 끝나지도 않을 것들 이었다. 정규앨범, 수영, 그리고 미국. 딱 보통만큼 부지런하고 게을러서 그보다 더 큰 목표는 무리였다.
봄에 미니 앨범을 내고는 꾸준히 정규앨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릴 때 조금 배워두어 물에 뜨긴 하는지라 가끔 혼자서 수영장에 간다. 여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레슨도 받아 볼 생각이다.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6월의 어느 날, 서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기도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 와볼걸. 그가 왜 캘리포니아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뻥 뚫린 하늘, 쨍하게 내리 쬐는 햇살, 그림 같은 예쁜 집들. 싫어할 이유가, 아니 그보다 더한 무관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몰랐을 뿐. 늘 그렇듯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우리가 만나기로 되어 있던, 지금이 그 때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일생에 몇 번 오지 않는 실로 놀라운 경험
지난 사랑을 끝내며 많은 걸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들여다보니 얻은 것도 많았다. 결과로 보면 실패지만 과정으로 보면 분명 전보다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랑은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확실히 더 낫다. 찾아온다면. 그게 아니라면 열한시간을 날아 직접 찾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캘리포니아와 사랑에 빠졌으니 앞으로 미국을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유럽에, 내 사랑 파리에게 안녕을 고할 생각은 없다. 장소를 사랑하는 건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그리고 그들도 사랑하는 이가 많으니 나 역시 그만을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다.
무관심에서 사랑까지의 거리는 채 1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더 멀리 간대도 하루, 어디든 아무리 길게 잡아야 일주일, 열흘이면 충분하다. 누구든 사랑에 가 닿는 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이 없는 하루보다 죽는 날 까지 하루라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When I fall in love, it will be forever, or I′ll never fall in love.
내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은 영원할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랑이라면, 하지 않을 거예요.
In a restless world, like this is, love is ended before its begun
이처럼 들썩이는 세상에서 사랑은 시작도 되기 전에 끝이 나곤 하죠.
and too many moonlight kisses, seem to cool in the warmth of the sun.
달빛 아래 수많은 키스들이 태양의 따뜻함에 차갑게 식어버리듯
When I give my heart, it will be complete, or I′ll never give my heart
제가 마음을 드릴 때는 마음 전부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결코 마음을 내주지 않을 거예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OST ‘When I Fall In Love’ 1993)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