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협곡이 장관이었다. 광활한 협곡과 황량한 사막의 이국적 풍경에 탄성도 잠시, 아랍의 태양이 대지를 데우며 불어온 뜨거운 모래바람에 현기증이 밀려왔다. 요르단계곡. 이곳은 팔레스타인 영토이지만, 이스라엘이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대대로 터전을 이루며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태양에 부서진 모래바람처럼 척박해지고 있었다. 취재는 엔지오 아디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지난 15일 오전 팔레스타인 동쪽에 위치한 요르단계곡으로 향하는 길. 사방이 사막이었다. ‘예수가 사흘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은 곳이 이곳일까.’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문득 차가 광야 한 가운데 멈춰 섰다. 이곳에서 바르달라 마을의 활동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국적 풍경에 넋이 나가있자니 잠시 후 라시드 활동가가 나타났다. 그는 손으로 사막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바나나, 포도, 사과, 오렌지 등 다양한 농작물을 일구던 녹색의 땅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서 밝힌 것처럼 현재의 요르단계곡은 거친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지난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간 체결한 오슬로 협정에 따라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이스라엘이 차지하면서 이곳의 팔레스타인인에게 고난이 시작됐다. 라시드는 말했다. “이곳의 녹색지대 대다수에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이 위치해 있고, 나머지 10%에만 팔레스타인 거주지가 있습니다.”
인근 팔레스타인 거주지로 향했다. 마을 아래에는 수로가, 위로는 막대한 전기가 흐르지만, 팔레스타인인은 물과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 학교나 의료시설도 전무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제한된 이스라엘 수자원 시설이 산 아래 있었다. 라시드 활동가에 따르면, 이 같은 29개의 이스라엘의 채수 시설들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해온 우물이나 강 근처에 위치해 있다.
거주민의 우물 깊이는 60~70미터인데 반해, 이스라엘 채수시설은 300미터를 파고 들어가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우물은 말라 버리고, 물이 넘쳐나던 수로는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드넓던 녹지는 현재의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이미 수로는 말라붙어 메마른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지난 겨울 퍽 많이 내린 비 덕분에 성인 한 명이 설 수 있을 폭의 수로에만 물이 흘렀다.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왔다. 더위를 식히려 이곳에 온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좁다란 수로에 몸을 담갔다. 물은 탁하고 쓰레기가 둥둥 떠 있었다. 수로 옆에서 눈을 껌벅이던 낙타 주위로 배설물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배설물을 밟고 그대로 다시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 옆의 채수시설에서는 쉴 새 없이 맑은 지하수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족한 물은 사거나 이스라엘 수로로부터 물을 빼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플라스틱 탱크로 팔레스타인 A 및 B 지역에서 물을 얻어다 C지역에서 물을 내다 파는 식인데, 물 가격이 현지 주민들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이라고 했다. 이마저도 단속이 심해져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때문에 수로에 관을 설치해 물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이 급습,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수관을 박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라시드 활동가가 거주하는 바르달라 마을의 한 수로는 직각에 가깝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군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정부도, 국제구호단체의 손길도 C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라시드는 답답해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오는 수로를 가리키며 “그들이 한 일이라곤, 수로의 물이 넘치지 않도록 높인 게 전부”라고 말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라시드는 한 번도 수로가 넘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라시드 활동가는 “1인당 하루 사용 가능한 물의 양을 20~50리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디의 이동화 국제활동가는 “유엔(UN)의 1인당 평균 사용량은 200~300리터이고, 한국은 350리터임을 감안하면 이들의 물 부족 정도가 어느 정도 인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시는 물과 샤워나 화장실 등에서 사용하는 물의 총합이 고작 20~50리터라면, 나머지 물은 어디로 갈까? 이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요르단계곡내 이스라엘 정착촌은 녹색의 거대한 풍광을 내뿜고 있었다. 거대한 대지에는 각종 농작물이 생산되고 있었다. 라시드는 “정착민들이 물을 펑펑 쓰고 있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상시적 물 부족은 농작물 재배나 불편함 외에도 여러 문제를 발생시킨다. 팔레스타인 의사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팔레스타인 의료구호센터(Palestinian Medical Relief Society)’의 모하메드 아부시 총괄책임자는 기자에게 팔레스타인인이 “물과 건강권 등 모든 측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상시적 물 부족 현상이 여러 질환 발생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 부족은 설사, 피부병, 탈모, 담석 등을 발생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러한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 사막의 흙집
정오를 지나자 기온은 더욱 높아졌다. 라시드가 황량한 사막에 지어진 황토색 흙집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국제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단 하루 만에 지은 활동 사무실이다. 벽은 진흙과 지푸라기로 굳혀 만든 벽돌로 쌓았다. 이유인즉슨 이스라엘이 C지역 내 추가 거주공간 증축을 불허하고 있고, 시멘트 사용도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초 뼈대를 쌓은 후 서둘러지어야 하는 것은 바로 지붕이다. 지붕이 없는 건물은 현장에서 철거가 가능하지만, 지붕이 있을 경우에는 소송을 제기,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네댓 평이나 될까한 공간을 지어 올리는 것도 도처에 번뜩이는 이스라엘 군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국제활동가들이 구금당하는 일도 있었다.
인근의 파사이 마을에서 온 자밀라 활동가도 이곳에서 지역여성 활동을 돕고 있었다. 지역 마을 여성들의 수공예품 제작과 판매가 그의 역할이었다. 아랍어-영어-한국어로 진행된 인터뷰는 시간은 걸렸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자밀라 활동가는 “현지 풀뿌리 시민단체 활동이 즐겁다”고 했다. 주민이 20명에 불과한 파사이 마을내 여성 활동가는 2명. 14~15세 청소년 5~6명도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사무실에는 마을 여성들이 만든 목걸이 등 수공예품과 여성 전통의상이 걸려 있었다. 자밀라 활동가의 말이다. “여성들의 경제활동의 수단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죠.”
우리를 안내한 라시드 활동가는 잘 생긴 외모에 호탕한 사나이였다. 그런 그가 과거 목격했던 일을 설명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자존심 강한 무슬림의 눈물을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체크포인트(이스라엘이 교통을 통제할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에 설치한 검문소)에서 목격한 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죽음. 그는 셔츠를 걷어 올려 연거푸 눈가를 닦았다.
2011년 팔레스타인 대도시 나블루스에서 요르단계곡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안에 라시드의 차도 있었다. 체크포인트에서 한 이스라엘 군인이 그가 딴 차를 보고 ‘차가 좋다’는 등 농담을 늘어놓으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때까지는 검문에 소요되는 지루한 시간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 군인이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발포를 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아흐메드, 대학생이었다. 발포를 한 이유가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총을 쏜 군인의 얼굴을 보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라시드가 얕은 한숨을 뱉었다. “그는 날 검문했던 사람이었어요. 키가 컸고, 수염이 있었죠. (평범했던)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 빼앗을 수 없는 것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기자가 만난 활동가 대부분은 생업을 갖고 있었다. 참다못해 활동가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태반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70여 년간 이어진 이스라엘 점령의 시간,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이어갈 순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강제당한 불합리를 때론 격렬하게, 그러나 유쾌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라시드 활동가가 사는 바르달라 마을의 풍경은 우리네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동양에서 온 시커멓고 지저분한 몰골의 기자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어딜 가든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눴다. 생전 처음 보는 한국인의 모습이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이곳에서 스페인에서 온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바르달라 마을에서 벽돌을 만드는 활동을 열흘째 하고 있었다. 기자와 일행도 벽돌 나르기에 동참했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힘을 북돋는 노동요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잠시나마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수다스럽고 흥이 넘치는 청년들. 잠시나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에 융화해 녹아들려는 태도가 흐뭇했다. 물론 이어지는 노랫가락과 쉴 새 없는 수다에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어느덧 해가 지고 바르밀라 마을의 하나밖에 없는 식당도 불을 밝혔다. 식당 앞에서 필라페(현지에서 주로 먹는 샌드위치류)를 입에 우겨넣고 있자니 동네 꼬마 녀석들이 일행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동네 이장님도, 마을 청년들도 외지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머물 곳이 마땅찮은 외지인에게 기꺼이 집을 내어준 이들도 있었다.
저녁 바람은 시원하고 강 건너 요르단의 도시 위로 보름달이 환했다. 도처에 쏟아질 듯 별이 그득했다. 외양간의 소는 음메 울고, 새벽을 잊은 닭은 연신 꼬꼬댁 목청을 올렸다. 그리고 부끄럼을 타며 기자를 훔쳐보던 소년. 7살이나 됐을까. 아이의 깊은 눈망울에 달빛이 어른댔다. 이곳은 팔레스타인의 한 작은 시골마을. 이스라엘은 이들로부터 물을, 자유를, 땅을 빼앗았지만, 빼앗지 못한, 빼앗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 눈망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르단밸리=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