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10월도 다 가고, 가을도 깊어 간다. 그래 마음을 잡으려고 늘 곁에 두고 살피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본다. 고인이신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구체적인 일상에서의 삶의 원칙이다. 오늘 아침 다시 공유하며, 마음을 청소하고, 나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다지고 싶다.
▫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 된다. 문제는 의미가 있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있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가 결합해야 즐겁다. 3일 일하고, 2일은 활동하고, 2일은 쉰다. 내가 만든 3-2-2법칙이다.
▫ 소유란 그런 것이다. 손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단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 부담없이 보면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도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욕심에서 나오는 것은 소유하려 하지 말고, 그 존재 자체를 즐긴다.
▫ 말이 많은 사람은 안으로 생각하는 기능이 약하다는 증거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의 내면이 허술하기 때문이고,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말을 아끼려면 가능한 타인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을 두고 아무 생각없이 무책임하게 타인에 대해 험담을 늘어 놓는 것은 나쁜 버릇이고 악덕이다. 그리고 사기꾼은 말이 많다. 말이 많으면 사기꾼이다. 진실되지 못하다. 진실은 한 마디만 해도 설득이 되지만, 궤변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온갖 근거를 끌어다 대고 조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하나같이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참으로 얻는 것이고 잃는 것인지 내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잃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너무 얻으려는 일에만 신경 쓰지 말고, 주려는 일에도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야 한다.
▫ 나그네 길에서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않는다. "있는 친구들은 겪어보고 받아들였으면, 그들을 내 영혼의 쇠고리로 잡아 메라. 허나 신출내기 철없는 허세꾼들 모두를 환대하느라 손바닥이 무뎌 지면 안 된다." 좋은 친구들은 소중하게 하고, 별로인 친구들은 만나지 말라는 말에 동의한다. 어리석은 자와는 길벗이 되지 않고, 혼자 놀기로 했다.
▫ 눈으로 보는 것에 지나치게 탐내지 않는다. 속된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멀리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 할 길도 없다.
▫ 날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때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천박을 경계한다. "절도 없는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도 말고, 친절하되 절대로 천박해지면 안 된다." 글쎄, 생각을 함부로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천박해지지 말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지 친절해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는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서 배운 다음의 기도를 한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기도한다.
▫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남의 영역을 침해하면서 욕심을 부린다면 자신도 해치고 이웃에게도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전문 지식을 익히고 그 길에 한 평생 종사하는 것도 그런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이기 때문이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흰 꽃처럼, 눈 빛들이 맑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너는 시간/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이기철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기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꽃밭을 산책한다
햇살의 재촉에 바빠진 화신은 좋아하는 사람께로 백리에 닿는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너는 시간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빨갛 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박한표(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