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5년 만에 선보이는 대하사극.’ 지난해 12월 시작해 이달 초 막을 내린 KBS1 ‘태종 이방원’에 따라붙던 수식어다. 대중에겐 기대를 더하는 말이었으나, 배우 주상욱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주상욱은 극 중 타이틀롤 이방원 역을 맡아 그의 일대기를 연기했다. 고된 순간도, 위기도 있었다. 모든 걸 이겨내고 작품을 끝마친 지금, 주상욱은 만고의 걱정을 덜었다. ‘태종 이방원’을 돌아보며 그는 “다행이고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주상욱을 지난 11일 서울 신사동 HB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났다. tvN ‘환혼’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다. 하지만 이방원으로 보낸 시간들은 여전히 그에게 생생하다. “‘환혼’이 퓨전사극인데 저만 정통 사극 발성을 내고 있더라”고 촬영장 이야기를 꺼내던 주상욱은 “현대극 말투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태종 이방원’이 그에게 남긴 기분 좋은 후유증이다.
“‘환혼’도 사극이긴 하지만 정통 사극과는 완연히 다르거든요. 그 누구도 사극처럼 연기하지 않는데 저만 너무 사극인 거예요. 감독님이 왜 그러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지금은 사극과 현대극의 중간 정도인 말투예요. 어느 순간부터 사극이 제게 익숙해진 거죠. 작품을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지만, 지금은 조금 아쉽기도 해요. 원래 잘되고 끝나야 아쉽잖아요. 하하.”
지금에야 웃지만 하는 동안은 여러 고생이 많았던 작품이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엔 대하사극이라는 중압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티저와 포스터 촬영을 거치며 작품에 확신이 생겼단다. “오히려 회차가 너무 적게 느껴졌다”며 아쉬워하던 그는 “100부작이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보는 사람들마다 사극이라 고생이 많다며 저를 안쓰러워했어요. 그런데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거든요. 처음에나 고민 많았지 나중에는 이거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더라고요. 힘든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도 재미있었죠. 이방원의 젊은 시절과 왕이 되기 전후에 차이를 두기 위해 노력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왕이 되고 나서의 감정선이나 이야기를 더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기존 사극에서 다룬 이방원과 주상욱의 이방원은 분명 달랐다. 카리스마 넘치는 철혈 군주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가족사, 고뇌 등을 조명하며 신선하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주상욱 역시 기존에 갖고 있던 이방원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 “한 인간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는 연민을 느꼈어요.” 미완성된 모습에서 완성된 왕으로 나아가는 이방원의 일대기를 연기한 건 그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방원이 나왔던 기존 사극들을 모조리 살펴봤어요. 보면서 ‘아, 나는 저렇겐 못 하겠다’ 싶었죠. 목소리부터가 대선배님들을 따라갈 수 없더라고요. 그렇다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기존 사극 속 이방원을 연기하자니 경쟁력이 없고. 그런데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막내아들이던 이방원의 가족사에서 출발하거든요. 그런 만큼 미숙한 모습을 거쳐 야욕을 드러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죠. 이방원은 실제로도 문인 출신이에요. 초반부 싸움을 잘 못하는 모습이 고증에도 가깝고, 보는 분들도 신선하게 여겨주신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어요.”
이방원의 생애를 연기하며 세심한 고민을 거쳤다. 선배 연기자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정통사극 기초를 조금씩 익혔다. 과거 이방원을 연기한 배우 김영철도 그중 하나였다. 사극에 필요한 연기 기술부터 시선 처리, 발성 연습까지 각고의 노력을 이어갔다. 그 덕분인지 제2의 최수종이라는 호평까지 받았다. 이 말이 나오자 곧장 손사래를 치던 주상욱은 이내 “근데 포스터 분위기가 좀 닮아 보이긴 하더라”며 웃었다.
“어우, 정말 영광이죠. 사실 처음엔 KBS나 시청자분들 모두가 우려하셨던 걸로 알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반응이 나오더라고요. 덕분에 힘 얻어 더 열심히,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태종 이방원’ 이후로 새 대하사극이 나오는 것도 뿌듯해요. 사극 부활 분위기에 보탬이 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고난도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상승세를 보이던 중 말 학대 의혹이 제기돼 논란이 됐다. 해당 말이 사망한 게 드러나며 한 달간 재정비 기간을 가졌다. 동 기간 주상욱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확진됐다. 최악의 시간을 보낸 그는 방송 재개 후 시청률이 다시 오르자 그제야 안도했다. “마음고생이 정말 컸다”며 울컥해하던 그는 “그래도 대하사극 팬 분들의 의리를 느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작품에 임하며 정통 사극에 대한 애정 역시 커졌다. 그에게 ‘태종 이방원’은 배우로서 새로운 변곡점을 찍는 계기가 됐다.
“KBS 대하사극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개인적으로는 ‘레벨 업’했다는 걸 느끼죠. 자신감이 커졌거든요.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려본 건 처음이었어요.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드라마가 제게 또 있을까 싶어요. 어떤 작품을 해도 자신 있게 임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연기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작품이에요. 앞으로도 배우로서 새로운 저의 길을 열어가고 싶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