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과 해방. 자주 쓰지 않던 말들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다. JTBC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서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가 삶에 염증을 느낀다. 어긋나고 비틀어진 일상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쉽진 않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살아가기엔 이들의 삶이 너무 고단하다. 무거운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 누군가는 추앙을 택하고, 누군가는 꽁꽁 감춰뒀던 아픈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배우 이기우는 ‘나의 해방일지’ 조태훈을 연기하며 스스로도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의 해방일지’가 이기우에게 남긴 작은 선물이다.
최근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기우는 여전히 작품 여운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전작들은 제가 나올 때만 재밌었는데, 이번엔 저보다 다른 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웠어요.” 촬영 현장을 회상하던 이기우의 얼굴엔 금세 애틋함이 피어올랐다. 계속 작품에 속해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이 드라마가 처음이란다. 그가 연기한 조태훈은 염미정(김지원)의 직장동료이자 아내와 이혼 후 홀로 자식을 키우는 ‘싱글 대디’다. 딸을 잘 키우기 위해, 누나를 돕기 위해,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그의 삶엔 숨통 트일 새가 없다. 어느 날 그의 앞에 염기정(이엘)이 나타나면서 삶에 꽤 괜찮은 균열이 생긴다.
외향적인 성격인 이기우가 극 내향적인 조태훈을 연기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대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미는 있더라고요.” 내향인을 이해하기 위해 연출을 맡은 김석윤 감독에게 수차례 조언을 구했다. 박해영 작가의 ‘글 맛’ 가득한 대본도 재차 탐독하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갔다. 이기우는 “어느 순간부터 나도 현장에서 말이 없어졌다”면서 “누가 내게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조태훈이 됐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씩 웃었다.
“보는 맛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드라마였어요. 이야기에서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았죠. 우리네 이야기와 닿은 지점이 많다 보니 시청자분들도 더 많이 공감해준 것 같아요. 사실, 등장인물 모두가 말이 없어서 걱정했거든요. 오히려 신선하다는 반응이 인상적이었어요. 걱정을 덜고 가벼운 마음으로 (조)태훈이가 되려 했어요.”
조태훈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조태훈의 무미건조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이나 가족들에게도 건조해서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고 돌아보던 이기우는 “이렇게까지 소극적인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실제로도 있다더라”며 웃었다. 조태훈을 이해하며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대본을 읽을 때 제 주관이 너무 개입되면 캐릭터 농도가 흐려진다고 느꼈어요. 이기우로서가 아닌, 객관적으로 대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죠.” 데뷔 20년 차 이기우에게 ‘나의 해방일지’가 준 가르침이다. 서사의 힘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초반부에는 경기도 배경의 전원일기를 보는 것 같았잖아요. 대사 없이 전철 타고 퇴근하거나 밭일을 하거나 혹은 그냥 무표정하거나… 이런 장면이 오히려 이 드라마에 힘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나의 해방일지’만의 분위기를 잡아둔 게 좋더라고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 그 힘이 더 커질 거라 생각했죠. 요즘 이런 드라마가 없었잖아요. 다 빠르기만 하고. 하하. 지인들에게도 이렇게 영상미나 분위기 있는 드라마가 어딨냐며 일단 더 보라고 계속 말하곤 했어요.”
스스로도 공감할 지점이 있던 작품이다. 기정 모친의 장례식이 그려진 14회 대본은 읽는 순간부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몇 년 전 작고한 부친이 생각나서다. “화장하고 인공관절만 덩그러니 남은 게, 제 기억과 너무 닮았더라고요.” 말하면서도 그는 울컥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SNS에도 그립다는 글을 썼어요. 많은 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응원해주셨죠. 1~16부 동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서로 아픔을 보듬고 공감한 덕에 작품도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아요.”
‘나의 해방일지’는 이기우의 배우 인생에 빼놓지 못할 작품이 됐다. “20~30대를 영화 ‘클래식’의 태수 덕에 먹고살았다면, 40대는 ‘나의 해방일지’의 태훈으로 살게 될 것 같아요.” 무엇에서 해방되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됐다.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벗고 싶어요. 정형화된 캐릭터에서 해방돼 실제 이기우와 비슷한 역할을 연기하고 싶죠. ‘이기우는 키가 너무 크다’는 선입견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어요. 약해졌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나의 해방일지’로 이기우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나의 해방일지’ 덕분에 인간 이기우의 내면이 더 풍성해졌어요. 말도 별로 없고,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인생 캐릭터가 됐죠. 돌아볼수록 감사한 일들만 가득해요.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에요. 2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앞으로를 더 알차게 채워가고 싶어요. 중요한 시기를 맞은 기분이거든요. 더 의미 있는 작품들로 제 배우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