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간 이사장 공백에 이어 중앙보훈병원장 사임까지. 국가보훈대상자의 의료와 복지를 책임지는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을 둘러싼 잡음이 들끓고 있다. 병원장 사임 배경과 공단 이사장 선임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며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애꿎은 보훈가족들만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일 유근영 중앙보훈병원장이 공단에 사표를 제출하고 수리돼 5일 사임했다. 병원장으로 재임한지 2년 7개월 만이다. 공단 관계자는 “지금까지 중앙보훈병원장으로 재임하며 병원 발전을 위해 헌신한 유 병원장께 감사하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유 병원장 사임 배경을 두고선 내·외부적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보훈병원 의사노조 소속 주인숙 중앙보훈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그동안 공단의 압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병원의 한 직원이 상사에게 알리지 않고 중요한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병원이 제지했고 그로 인해 낮은 인사 평가를 받자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국가보훈부에 병원장에 대한 투서를 보냈단 설명이다. 이후 공단은 보훈부로부터 투서를 이첩 받아 유 병원장에 대한 복무 감사에 착수했고 이를 버티지 못한 그가 억울해하며 사표를 냈단 주장이다.
주 과장은 “공단은 이사장 공백에 보훈부 장관까지 최근 교체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왜 병원을 위해 노력한 병원장을 감사까지 해 교체하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의료 현장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병원이 주먹구구식으로 명령만 내리면 실적이 나오는 행정기관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공단은 지난해 7월 공공기관 중 유일하게 경영실적 평가에서 ‘아주 미흡(E)’ 등급을 받고 기획재정부의 해임 건의에 따라 감신 이사장이 사임하며 현재까지 이사장 공석 상태로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 중이다.
주 과장은 “최근까지 공단의 병원 후진 경영에 실망한 수많은 전문의가 대거 퇴직하는 위기 상황을 겨우 진화해 병원을 끌고 나가고 있다”며 “전문의 수급이 어려워 60세를 정년으로 퇴임한 전문의들을 다시 병원으로 불러들이거나 1~2년 단위로 재계약하는 등의 고육책도 벌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동안 경영 정상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병원장에 대해 공단은 사퇴 압박을 이끌어냈다고 축배를 들지 모르지만, 이는 병원 의사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다”며 “보훈부 승격으로 보훈병원의 위상이나 진료 여건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 전문의들은 그저 허탈할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중앙보훈병원 평균 병상 가동률 78.5%
주 과장의 설명과 상반되는 주장도 있다. 보훈처(현 보훈부) 요직을 두루 거쳐 공단 현황에 밝은 익명을 요구한 A씨는 “허황된 이야기”라며 그의 주장에 선을 그었다. 유 병원장에 대한 직원 고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저지른 비리들이 모두 드러나면서 크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회피하기 위한 ‘면피성 사표’라는 주장이다.
A씨는 “공단과 중앙보훈병원 간 사이가 좋았는데 유 병원장이 오면서 관계가 틀어졌다”며 “유 병원장의 부실 운영으로 병상 가동률이 떨어지고 의료 인력 부족으로 진료·검사 시간도 오래 걸려 직원뿐 아니라 보훈가족들의 원성이 크다”고 전했다.
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병상 가동률은 78.5%를 기록했다. 의사직 집단 이탈에 따른 진료 공백으로 2022년 6월 기준 초음파는 57.4일, CT(컴퓨터 단층촬영)는 33.0일의 검사 대기시간이 소요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환자 경험 평가에선 환자권리 보장 점수는 79.75점으로 병원 환경 92.55점, 간호사 영역 91.96점에 비해 낮았다.
지난해 12월 보훈부 장관의 대통령 임용제청을 거쳐 공단 이사장 취임만을 앞둔 선정 절차 막바지에 돌연 임용을 취소하고 재공모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의문이라고 했다. A씨는 ‘공단 이사장은 의사가 맡아야 한다’는 유 병원장의 주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의심하며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A씨는 “공단은 6개 보훈병원, 8개 요양원, 휴양원, 보훈원, 보훈복지타운, 재활체육센터, 보훈교육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산하기관만 19개가 되는 종합복지기관”이라며 “공단의 주인은 의사들이나 공단 직원들이 아닌 조국을 위해 헌신한 보훈가족과 보훈단체다”라고 강조했다.
보훈가족 불만 가중…“불편 한두 가지 아냐”
혼란스런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건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들이다. 지난 1965년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참전했던 80대 국가유공자 B씨는 10년 넘게 중앙보훈병원을 다니고 있다. B씨와 통화한 이날도 그는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B씨는 “안 그래도 여러 가지 개선할 게 많은데 공단 이사장 공백에 병원장까지 나간다니 우려가 크다”며 “서비스를 받는 수혜자 입장에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환자 안내 시스템도 엉망이고, 의료진도 불친절하며, 3개월 전부터 병원 예약을 해도 진료가 밀릴 때가 많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 “실무 직원들은 부족할 수 있어도 조직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기관장의 공석이 있어선 안 된다”며 “공단과 보훈병원이 속히 정상화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공단은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하며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단 입장이다. 공단 관계자는 “공단은 공공기관 평가에서 2020년 C등급, 2021년 C등급, 2022년 E등급을 받았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해 송구스럽다”면서 “공단 7000여명의 임직원은 합심해 경영 정상화와 경영 평가 등급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보훈가족 복지 향상을 위해 실질적인 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의료 인력을 재배치해 보훈병원 경영 효율화를 도모하고, 병원장 중심 책임 경영을 강화해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 제공과 진료 실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유 병원장으로부터 사임에 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