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익숙하다. 이름 있는 병원이라면 만사 제치고 찾아간다.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다. 한 번에 200만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시술비가 벅차 지원금을 더 준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고려한다. 그나마 일련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들은 참아볼 수 있지만, 거듭되는 실패는 마음을 깎아내려 견디기 어렵다. 임신만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린 ‘난임 부부’다. 치료 과정은 우리에게 긴 ‘여정’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 부부의 여정을 쿠키뉴스를 통해 전한다. <편집자주> |
“대학에서 학점 채우고, 직장에선 커리어 쌓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부지런히 돈 벌고, 결혼해서 가까스로 집을 구했어요. 이제 좀 아이를 가져보려는데 병원에서 제가 난임 환자라고 하네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난임 시술을 시도한지 수년째.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서현(가명·40대)씨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갔다. 난임 시술에 집중하기 위해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관계를 끊고 치료에만 매달렸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정서적으로 고립됐고, 배란유도주사(과배란주사)를 맞으면 몸에 이상도 생겼다. 불면증을 얻기도 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때때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임 시술을 위해 배란유도주사를 맞으면 편도에 자주 염증이 생겨요.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밤에 잠도 잘 안 와요. 시술이 거듭될수록 큰 좌절감을 느껴요.”
생체 리듬에 따라 난자의 질은 달라진다. 검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견돼 치료 방향을 바꾸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체력적인 부담과 스트레스가 일상에 깔렸다. 난임 문제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일도 잦아진다. 그만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들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나와 남편을 빼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질 좋은 난포(난자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현재 체외수정(시험관) 시술 시도를 잠시 중단하고 쉬고 있다.
실패로 인한 좌절, 세상과의 단절
난임 시술을 통해 겨우 임신에 성공했지만 유산하고만 가족도 있다. 수정해서 임신 8주까지의 발달 단계를 배아, 9주가 지나면 태아라고 부른다. 박경하(가명·40대)씨는 임신 8.5주차에 유산했다. 유산 사실에 박씨의 세상은 와르르 내려앉았다. 자신만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이 비수가 돼 가슴에 꽂혔다. 난임 관련 언론 기사에 달린 ‘결혼 늦게 한 네 탓이지’라는 댓글을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치료를 포기하게 만드는 건 비용에 대한 부담이 아닙니다. 실패로 인한 좌절감이 훨씬 더 커요. 주변에선 난자 공여를 받으라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전 임신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제 유전자를 지닌 아이를 갖고 싶은 거예요.”
박씨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고 치료 과정에서 숱한 고통을 겪지만 포기할 마음이 없다. 박씨는 난임 시술 과정이 겁이 나 치료를 망설이는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망설이면 늦어요. 1~2년 더 빨리 시작하지 못한 제 자신을 지금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간 이어진 실패 경험은 좋은 임신 방법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해요. 더 훌륭한 의사를 찾기 위해 병원 원정을 돌기도 해요. 순조로운 난임 치료 방법을 찾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많으니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산 의지 옥죄는 지원 차수 차감
난임 시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사는 지역이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시술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난임 부부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비용’이다. 특히 고차수 난임 부부들은 차수가 쌓여 최대 지원 횟수를 넘긴 뒤엔 전액 자비를 들여야 하는 상황을 두고 걱정이 앞선다. 나팔관이 막혀 인공수정을 건너뛰고 지난해 2월 첫 시험관 시술을 시작해 15차수를 넘긴 김지혜(가명·30대)씨는 정부 지원이 확대되길 바란다.
체외수정은 인공수정으로 임신에 계속 실패한 경우뿐만 아니라 △여성의 난관이 모두 막힌 경우 △절제 수술로 양측 난관이 없는 경우 △난관성형 수술을 받았으나 임신에 실패한 경우 △정자 수가 부족하거나 운동성이 부족해 정상 임신이 되지 않는 경우 △원인불명 난임인 경우 등에 이뤄진다. 김씨는 난소에 남아 있는 예비 난자 세포가 감소한 ‘난소 기능 저하증’, 남편은 정상 형태의 정자가 4% 미만인 ‘기형 정자증’을 진단받았다.
“첫 시험관 시술을 받은 게 작년 2월이니 1년 7개월 만에 15차수에 도달했어요. 난소 기능 저하 난임은 신선배아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임신이 힘들어요. 게다가 남편은 기형 정자증을 앓고 있어요. 여러 번의 시술 시도 끝에 기형 정자증이란 사실을 알게 됐고, 정계정맥류 치료를 통해 차츰 정자 상태가 좋아지고 있어요. 다시 희망을 갖고 임신 시도를 이어나가려고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 남은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원 횟수를 모두 소진하고 나면 건강보험이 아닌 자부담으로 시술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요.”
현재 인공수정 5회, 체외수정 20회 총 25회의 난임 시술에 대해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고 있다. 만 44세 이하는 본인부담률 30%가 적용된다. 신선배아 체외수정은 9회까지 1회당 최대 110만원, 동결배아 체외수정은 7회까지 1회당 50만원, 인공수정은 5회까지 1회당 30만원씩 지원된다. 45세 이상인 경우 본인부담률 50%를 적용해 각각 90만원, 40만원, 20만원씩 지원이 이뤄진다. 연령을 기준으로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난임 시술 본인부담률은 다음 달부터 일괄 30%로 조정될 예정이다. 시술 시 필수적으로 사용되지만 비급여 의약품이라 환자 부담이 컸던 자궁착상보조제, 유산방지제 등에 대해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고, 과배란주사제의 급여 적용 기준은 완화된다.
하지만 과배란주사를 투여해 난자를 채취해도 수정이 안 되면 시술 실패로 간주돼 건강보험 지원 차수가 차감된다. 이런 식으로 김씨가 차수를 허비한 게 세 번이다. 사실상 이제 그에게 남은 지원 기회는 다섯 번이다. 난임 시술 지원 기회를 다시 25회로 되돌리는 방법이 있긴 하다. 출산하면 된다. 난임 시술로 아이를 얻은 뒤 아이를 더 낳고 싶은 부부들에게 추가 기회를 제공한다. 첫 아이도 갖기 힘든 김씨에게 또 한 번의 기회는 아직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김씨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첫 아이만이라도 시험관 시술 지원을 무제한으로 늘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 된다면 수정 실패는 지원 횟수 차감을 안 했으면 해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카운트하다니요. 제 의지로 치료를 중지한 것도 아닌데 의학적 사유로 제대로 된 이식 한 번 못 해보고 차수가 끝나는 것이 너무 억울해요. 첫 아이가 있어야 둘째 아이도 있는 거잖아요. 저희 부부는 많은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저희처럼 힘든 가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