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산 천년 옛길에서 역사와 마주하다

백화산 천년 옛길에서 역사와 마주하다

기사승인 2016-09-13 12:24:38

- 김유신 장군 백제정벌 당시 병력·물자 지원하던 대궐터

- 몽골 장군 잘라타이 대군 참패 안긴 호국성지 저승골

- 백화산 곳곳 대몽항쟁 역사 고스란히

 


[쿠키뉴스 상주=최재용 기자] ‘백화산 호국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구수천(龜水川) 천년옛길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의 옥동서원에서 시작된다. 

해발 933m의 백화산은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할 명산이지만 2007년 우리나라 호적에 올라간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산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백화산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백화산의 기를 사로잡는다는 의미로 최고봉인 한성봉(漢城峰)을 포성봉(捕城峰)으로 바꿨다.

2008년 5월 세워진 백화산 한성봉 표지석 뒷면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잘 새겨져 있다.

“일제가 ‘성을 사로잡다’는 뜻으로 포성봉이라 개칭한 것은 저들의 흉계인데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청원해 옛 이름을 되찾음은 백화산의 영기가 발현됨이다.”

수봉리에서 출발해 백화산에 오르면 처음 만나는 것이 작은 사찰인 보현사다. 


산길을 걷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때면 대궐터와 금돌성(今突城)을 만날 수 있다. 대궐터는 660년 김유신이 이끄는 백제 정벌군을 보낸 후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주둔해 추가적인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전쟁 지도부를 설치했던 곳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실현한 태종무열왕이 백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소부리성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 지금은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는 석축으로 그 터만 확인할 수 있다.

백화산성으로도 불리는 금돌성(경북문화재자료 제131호)은 백화산 주능선 일대에 축조된 포곡식 석성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위한 주요한 전투마다 태종무열왕이 행궁으로 삼고 태자(문무왕), 김유신과 함께 머무르던 곳이다. 고려시대 몽고 장군 차라대가 침공했을 때 황령사 승려 홍지가 이끈 관민이 침략군 과반을 죽인 호국성지였다.


백화산 북쪽 자락에 있는 저승골은 몽골의 6차 침입 때인 1254년 10월, 황령사의 승려 홍지가 이끈 승병들이 몽고의 장군 잘라타이(차라대·車羅大)의 대군을 유인해 참패를 안긴 골짜기다. 

차라대가 홍지에게 대패해 성을 넘지 못하고 한탄한 데서 한성봉(恨城峰)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한성봉(漢城峰)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고 해 구전된 지명이다.

상주항몽대첩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2013년 백화산 입구에 항몽대첩 기념탑을 세웠다.

불사이군(不事二君·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충절을 지킨 악사에 대한 설화도 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대는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의 화산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 북쪽을 보며 거문고를 켰다고 한다.

그는 태조가 거듭 부르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꺾지 않고 거문고를 품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바로 임천석대가 그곳이다.

이밖에 구수천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가 바위에 새겼다는 ‘세심석’(洗心石)도 백학산의 명소로 꼽힌다. 

gd7@kukinews.com
최재용 기자
gd7@kukinews.com
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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