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라는 건 간단하다. 22명이 90분 동안 공을 쫓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
영국의 선수 출신 해설가 게리 리네커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남긴 말이다. 준결승에서 서독(독일)에 패하는 잉글랜드의 모습을 보고 해설 도중 언급한 이 한 마디는 축구계 명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지난 27일 독일이 한국에게 패하자 리네커는 자신의 SNS를 통해 "독일이 더는 늘 이기진 않는다"라고 자신의 말을 수정하기도 했다. 말 한 마디의 힘은 그만큼 크다.
안정환, 이영표, 박지성 세 명의 해설위원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한국 대표팀의 매 경기가 극적이었던 만큼 경기 직후 회자된 해설위원들의 말도 많았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독일전에서 언급한 ‘까방권’은 다음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에 긴 시간 오르기도 했다. 일찍 마무리된 이번 월드컵의 아쉬움을 해설위원들의 가지각색 어록으로 달래보자.
△ 안정환 MBC 해설위원
“중동에만 ‘침대 축구’가 있는 줄 알았는데, 북유럽에도 있었네요.”
→ 지난 18일 스웨덴전에서 후반 33분 세바스티안 라르손이 경기장에 드러누운 모습을 보고 한 발언. ‘침대 축구’는 앞서거나 유리한 경기에서 고의적으로 넘어지거나 경기장에 누워 경기를 지연시키는 행동을 뜻한다. 후반 20분 비디오판독(VAR)으로 페널티킥 골을 허용하며 0-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느낀 안정환 위원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상대가 슈팅을 하기도 전에 태클을 넣으면 어떡하나. 공격수는 그걸 기다리고 있는데. 태클은 무책임한 회피일 수 있습니다.”
→ 지난 24일 멕시코전에서 후반 20분 치차리토에게 태클을 시도한 장현수에게 한 발언. 장현수의 태클을 기다렸다는 듯 피한 치차리토는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맞이했고 추가골을 넣는 데 성공했다. 주로 선수들 입장에서 기운을 불어넣는 안정환 해설위원답지 않은 쓴 소리였다. 전반전에서 페널티킥을 내준 데 이어 후반전에도 실점을 막지 못한 장현수는 경기 후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경기에서 지면 그 상처는 평생 가지만, 경기 중에 다친 건 치료하면 되거든요.”
→ 지난 27일 독일전에서 경기 초반 몸을 던져 상대팀 공격을 막아내는 선수들에게 한 발언. 언뜻 잔혹해보일 수도 있지만, 세 번의 월드컵을 직접 겪은 축구선수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조언. 뒤집어 생각해보면 월드컵의 패배가 선수들에게 얼마나 쓰라린지, 또 승리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
“이거 오프사이드였으면 지금 마이크 던지고 내려가려고 했어요.”
→ 독일전에서 후반 47분 비디오판독(VAR)을 통해 김영권의 골이 오프사이드가 아닌 것으로 인정된 직후 발언.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골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심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장면. 분명 격한 발언이지만 안정환 해설위원 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축구 경기를 보고 흥분한 동네 아저씨 같은 친숙한 해설의 결정판.
△ 이영표 KBS 해설위원
“이 경기를 어린 선수들도 볼 텐데, 저 장면에서는 태클을 해선 안 된다.”, “실수가 반복되면 실력.”
→ 멕시코전에서 전반 24분 안데레스 과르다도의 크로스를 위험지역에서 태클로 저지하려다 공이 팔에 맞아 페널티킥을 내준 장현수에게 한 발언. 스웨덴전에서 페널티킥을 내준 김민우의 위험한 태클에 이어 또 한 번 페널티킥을 내주자 작심하고 뼈아픈 말을 던졌다. 수비수 출신답게 수비의 기본기까지 언급하며 장현수를 정면 비판. 한국팀이라도 비판해야 할 때는 하는 이영표 해설위원의 스타일이 엿볼 수 있는 말.
“김영권에게 5년짜리 까방권(까임방지권)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 독일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김영권이 골을 넣는 모습을 보고 한 발언. 그만큼 김영권의 독일전 한 골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항상 정제되고 차분한 해설을 선보이던 이영표 해설위원이 ‘까방권’이라는 비방용 표현까지 사용할 정도로 흥분한 모습이 인상적.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까방권’이라는 표현을 알게 되는 부가 효과를 낳았다.
“제가 해설을 5년 했는데, 그동안 칭찬한 것보다 오늘 칭찬한 게 훨씬 많다.”
→ 독일전을 2-0 승리로 마친 이후에 한 발언. 힘든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뛴 선수들에 대한 고마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칭찬에 인색한 스스로를 ‘디스’하면서까지 선수들의 경기력을 치켜세우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 박지성 SBS 해설위원
“4년 전 브라질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 자체가 얼마나 성장했느냐를 보면 사실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 모습을 보는 선배 입장에서 많이 속상하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멕시코전에서 패배한 이후 경기를 정리하면서 한 발언. 세 해설위원 중 가장 최근까지 한국 대표팀에 있었던 박지성 해설위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 한국 축구를 가장 냉정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선수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현우에게 절을 해야 마땅하다. 너무나 완벽한 선방을 보여줬다.”
→ 독일전 승리 이후 골키퍼 조현우를 활약상에 대해 언급한 발언. 선수들에 대한 비판이나 칭찬을 아끼던 평소 스타일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을 쏟아냄. 한국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절을 해야 한다’는 표현을 선수를 칭찬하는 상황에 쓴 절묘한 사용법이 인상적.
“비록 오늘 좋은 경기를 펼쳐 유종의 미를 거두긴 했지만, 한국 축구가 해결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바꾸겠다고 하면서 바꿨다고 팬들에게 보여주지만, 그것이 미래의 한국 축구를 위한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 독일전을 마치고 한국의 이번 월드컵 경기들을 종합하면서 한 발언. 마지막 경기의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달콤했지만, 그럼에도 한국 축구가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 패배 후에도, 승리 후에도 비슷한 관점에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박지성 해설위원의 일관성과 냉정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앞서 한국 축구협회를 향한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지성 해설위원이 한국 축구를 더 먼 위치에서, 더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MBC, KBS, S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