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요원 1명이 이스라엘군에 피살됐다. 사망자의 나이는 이십대로 알려졌다.”
지난해 6월 우리 언론을 통해 이같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은 이 사건은,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희생자는 라잔 알 나자르, 간호사였다. ‘팔레스타인 의료구호협회(Palestinian Medical Relif Society, PMRS)’에서 의료자원봉사를 하던 그는 가자지구 금요집회에서 시위대를 돌보다 변을 당했다. 참고로 제네바 협약은 ‘전투의 범위 밖에 있는 자와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고인이 가슴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을 두고 군이 조준 사격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이스라엘 군은 그녀가 생전 ‘전선에서의 인간방패 역할을 한다’고 말한 인터뷰 영상을 편집, 하마스의 일원으로 반이스라엘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인도주의 활동을 펴다 피살된 희생자를 모독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기자는 지난 8월19일 오후 3시(현지시각) 라잔이 몸 담았던 ‘팔레스타인 의료구호협회’를 방문했다. 서안지구 라말라에 위치한 PMRS는 5층 규모의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센터 곳곳에는 아직도 라잔을 추모하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모하메드 아부시 총괄책임은 “희생된 의료인이 더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만 인도주의 구호 활동 중 사망한 소속 의료인은 두 명. 서안지구 베들레헴에서도 피살된 의료인이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만난 다수의 관계자들은 이곳에서 제네바 협약, 국제인권법, 세계인권선언 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과거 가자지구에 대한 유엔특별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에 국제인권법 이행을 권고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국제인권단체 ‘알 하크(AL-HAQ)’의 샤완 자브린 대표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인권유린 사례”라며 “국제인권법의 이행여부는 국제사회의 여지에 달려있는데, 유엔 등은 이행의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자에게 “한국은 이스라엘의 인권유린에 대해 왜 침묵하느냐”고 반문했다.
◇ 치료받을 권리의 박탈
PMRS는 현지 의사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인도주의 의료지원단체다.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여성·아동 헬스케어 ▲지역사회에서의 장애인 의료접근 시스템 구축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과 심장질환 등 중증질환의 치료 지원 등을 실시하고 있다. 희생된 의료인들도 의료가 미치지 못한 곳에서 구호활동을 펴다 목숨을 잃었다. 모하메드 총괄은 “의료인을 비롯해 다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일상적 위협에 시달린다”며 “우린 의료서비스의 차별적 접근을 해소하자는 미션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당면한 문제는 단절된 의료접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가자지구를 비롯해 서안지구에서 예루살렘의 의료기관에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팔레스타인 각 도시에서 병원에 이르는 길은 체크포인트(검문소)에 의해 접근이 지연되거나 불허되기 일쑤다. 예루살렘 병원의 진료도 까다로운 등록 절차가 요구된다.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인보다 치료비의 3배를 더 지불해야 한다. 모하메드 총괄은 “체크포인트에서 길이 막혀 출산을 하거나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답답해했다.
이러한 의료접근권 제한과 관련, 알 하크의 샤완 대표는 “서안지구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고 있는데, 예산 확보가 어려워 변변한 의료시설을 갖추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빈혈과 영양실조, 백혈병 등은 팔레스타인 여성·아동·노인 등 취약계층의 사망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이다. 지역사회에서 풍토병 등 각종 감염병도 목숨을 위협한다. 모하메드 총괄은 “소득 격차에 따른 사망률 차이가 크다”며 “절반에 가까운(45%) 팔레스타인인들이 빈곤층이며, 특정 지역에서는 아동의 백혈병 발병률이 유의미하게 높은 수치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수자원 강탈로 인한 상시적 물 부족 현상도 여러 질환 발생률을 높이고 있었다. 모하메드 총괄은 “물 부족 현상으로 인해 설사, 피부병, 탈모, 담석 등이 발병률이 높다”고 밝혔다.
기본 의료시스템도 미비하긴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의 보건의료 실태는 자치정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정부 건강보험의 가입률은 50% 가량에 불과하다. 보장률은 가입기간 5년 50%, 10년에 80% 등 보험 가입 기간에 따라 달라진다. 4인 가구 기준 일 년 평균 보험료는 300달러(한화 35만원)이지만, 경제 사정이 녹록치 않은 탓에 일반인들은 보험 가입을 주저한다. 기간에 따른 보장률 차이는 환자의 의료비 부담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모하메드 총괄은 “건강보험제도는 비교적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서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라말라내 팔레스타인여성위원회 소속 마날 활동가도 정부 보험에 대해 “정부 보험은 경제 부담이 커 일반인은 잘 가입하지 않는다. 부정부패가 많고, 여성과 아이들은 제때 적절하고 동등한 치료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성질환 예방을 가로막는 것은 접근의 어려움이다. 팔레스타인 여성은 홀로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근 병원으로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가야한다. 가사로 바빠 검진을 위한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이런 요인들이 여성의 부인과 질환 예방에 걸림돌이 된다.”
지역사회의 부인과 검진 현황에 대한 모하메드의 답변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PMRS는 이동진료소를 검진을 지원 중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진료소도 운영하고 있지만, 서안지구 전역의 의료공백을 메우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여성과 아동 등 특히 의료접근이 어려운 이들을 돌볼 종합적인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라말라(팔레스타인)=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