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소재, 낯선 채널, 낯선 캐릭터. 모든 게 낯선 드라마지만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상한 주인공의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는 국내를 넘어 세계인의 마음에 콕 박혔다. 배우 하윤경은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 신드롬을 보며 사람들이 따뜻한 이야기를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역시도 ‘우영우’의 따뜻함에 흠뻑 빠졌다.
하윤경은 극 중 우영우의 동료 변호사 최수연 역을 맡았다. 시청자에겐 이름보다 ‘봄날의 햇살’로 익숙한 캐릭터다. 우영우의 천재성에 좌절하면서도 자폐인인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면 주저 없이 돕는다. 얼핏 까칠해 보여도 가장 다정하고 든든한 우군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하윤경에게는 최수연과 닮은 점이 여럿 보였다. 그에게 ‘우영우’는 여러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우영우’는 처음으로 오디션 없이 캐스팅된 작품이에요. 인정받는 기분보단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어요. 그러면서도 믿음직한 배우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커졌죠. 기분 좋게 마음이 무거웠다고 할까요?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임했어요. 저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준비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전문직 캐릭터를 경험해봤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변호사 역할을 준비하며 자폐인의 주변인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고심했다. 하윤경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공부하고 이해했지만, 그걸 바탕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며 “배려와 가감 없이 친구로 다가가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수많은 시간을 거쳐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 완성됐다.
“자폐인에게 좋은 도움이 무엇일지, 적절하게 다가가는 건 어느 정도일지 계속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수연이가 겪었을 고민도 자연스럽게 느껴졌죠. 수연이는 영우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간 친구예요. 처음부터 그러진 못했을 거예요. 때로는 쓸데없이 도와줬다며 후회도 했겠죠. 시행착오를 거치며 영우의 친구로 거듭난 것 같아요. 그런 배려가 보여서 많은 분께서 수연이를 좋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인상 깊던 순간이 많았다. 영우가 수연에게 이준호(강태오)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다 ‘나를 좋아하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하는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하윤경은 “수연이는 여느 사람처럼 자격지심을 느끼지만 그걸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서 “영우에게 질투와 속상함, 안쓰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 마음에 박혔다”고 돌아봤다. 영우가 수연에게 ‘봄날의 햇살 같다’고 말하는 모습 역시 명장면이다. 하윤경은 “그 순간 비로소 수연이에게도 영우가 봄날의 햇살이 된 것”이라면서 “표현이 많진 않아도 서로를 소중해하는 두 사람 모두 햇살 같다”며 애틋해했다.
하윤경에게도 ‘우영우’는 봄날의 햇살이다. 가장 지쳐있을 때 만난 작품이다. 쉼 없이 노력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윤경은 “‘우영우’에서 세세하게 설정한 장면들을 알아보셔서 감사했다. 노력에 대한 피드백이 온다는 게 남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한 유명세가 아닌, 노력을 알아주는 온정이 고팠다.
“대본에 없던 디테일을 연구했어요. 남몰래 영우를 보는 시선이나 영우를 보호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을 넣어봤죠. 그런 것들이 모이면 수연이가 더 입체적으로 보이니까요. 겉으론 짜증 내도 눈빛에 진심을 담는 걸로 균형을 맞췄죠. 영우를 말릴 때 옷깃만 잡는 것도 나름대로 넣어 본 거예요. 수연이는 영우가 손길에 민감한 걸 아니까요. 시청자분들이 이런 걸 알아보시는 게 감사했어요. 제가 그동안 노력해온 것들이 비로소 빛을 본 느낌이었죠.”
데뷔 7년차에 빛을 봤다. 하윤경은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다. 그는 조급했던 20대를 거쳐 서른을 앞두고 여유를 찾았다. 자신의 쓰임새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조금씩 나아질 거라 믿으며,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온 수많은 날이 있었다. 하윤경은 “열정이 크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절망을 해보니 성숙해졌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불안하고 모났던 과거는 지금 하윤경을 만든 발판이 됐다.
“연기를 너무 사랑했어요. 인생에 연기밖에 없었죠. 그래서 위태로웠어요. 너무 몰두하면 무너졌을 때 회복하기 어렵잖아요. 그런 시기를 보내니 새로운 깨달음이 생기더라고요. 예전의 저는 열정 100%로 살았거든요. 이젠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죽여도 죄책감 없이 기쁘게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 ‘우영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채워준 작품이에요. 늘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어떻게 사람이 매번 잘하겠어요. 그래도 연연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하면 좋은 기회는 반드시 와요. 지금 누리는 인기는 한순간이에요. 하지만 이 기억으로 힘내면서, 노력하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