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 세계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 변성현 감독은 배우 전도연을 이렇게 평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선배였다. 안면은 텄으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본 적은 없는 사이. 머나먼 별처럼 느껴지던 그 선배가 지나가는 말로 “감독님 지금 쓰는 거, 나랑 하자”고 말했을 때, 변 감독이 부담감에 휩싸인 건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그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도연이라서다.
“즐기면서 찍을 수 없었어요.” 지난 6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변 감독은 넷플릭스 ‘길복순’의 제작과정을 설명하며 말했다. 그는 촬영기간 내내 예민했다고 돌아봤다. 마음속에서 언제나 혼자만의 전쟁을 치렀다. 변 감독 현장은 늘 음악을 틀어두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길복순’ 현장에선 그렇지 못했단다. 본격적인 액션 장르에 도전하는 게 그를 날서게 했다. 현장의 작은 것들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변 감독은 “화기애애한 현장을 좋아했지만, ‘길복순’ 이후 치열한 쪽으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만든 ‘길복순’은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 시청자를 매료시켰다. ‘길복순’이 공개 3일 만에 거둔 성적은 비영어권 부문 1위(넷플릭스 톱 10 집계). 흥행에 목말랐던 변 감독이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단다. 신나는 것보다 안도감이 커서다. 전도연·설경구에 카메오로 출연한 황정민까지, 걸출한 배우들이 함께한 영화다. 전도연을 중심으로 구상한 ‘길복순’은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빗댄 킬러 세계로 배경을 구체화하며 몸집을 키웠다. “사람 죽이는 일이지만 평범한 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회생활처럼 그리고 싶었어요.” 변 감독이 그 치열한 세계의 정점에 세운 건 전도연이다.
“선배님의 이전 영화를 보면 어느 순간 주변인에게 희생을 당하는 캐릭터로 쓰이더라고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무뢰한’(감독 오승욱),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이 그랬듯이요. 하지만 실제로 본 배우 전도연은 ‘이 바닥’에선 다가가기 힘든 존재예요.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길복순’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만든 작품입니다. 생활감을 입은 모습보다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느낌을 표현하려 했어요.”
변 감독을 움직이게 한 건 전도연의 갈증이다. 그간 전도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대동소이했다. 변 감독이 전도연을 처음 만난 날, 팬이라고 하는 감독에게 전도연은 이렇게 말했단다. “다들 만나면 팬이라 해요. 시나리오를 안 줘서 그렇지.”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면서도 함께하자는 말은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전도연 선배님이 출연하는 작품이면 정말 잘 해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설경구 선배님께도 비슷한 부담이 있었지만 이번엔 부담이 훨씬 더 컸어요.” 좋아하는 배우 1, 2위를 다투는 두 배우를 ‘길복순’이란 프레임에 담으며 많은 감정이 오갔다.
“두 배우가 정말 연기 잘한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전도연 선배님은 우리나라가 아닌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연기 잘하는 배우예요. 설경구 선배님은 워낙 좋아하는 배우고요. 두 배우가 맞붙는 장면이 적었어요. 그래서 만날 장면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죠. 이들이 호흡한 작품이 세 번째라고 해도 저와 함께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요. 때문에 디렉션을 세세하게 드리며 욕심을 좀 부렸죠. 두 분 다 잘 맞춰주셔서 감사했어요.”
변 감독은 OTT 플랫폼에 맞게 통통 튀는 느낌을 한껏 살려 ‘길복순’을 완성했다. 여성 캐릭터가 주축을 이루는 데다 킬러 회사가 나오자 일각에서는 영화 ‘킬 빌’과 ‘존 윅’이 떠오른다는 반응도 있었다. 변 감독은 ‘킬 빌’과 비교가 불가피할 것을 예상해 주인공 성을 길로 정했다. “새로운 걸 창조하기보단 기존 영화를 비트는 걸 좋아해서”다. 그는 늘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때마다 떠오르는 영감을 좇아 작업한다. 전작 ‘킹메이커’를 마친 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고갈됐던 그에게 전도연과 만남은 ‘길복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서 늘 고민”이라면서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향을 염두에 둔 듯 말했다.
“매번 시나리오를 직접 썼지만, 이젠 다른 작가분께 글을 받아보려 해요. 제가 만든 이야기가 정형화됐다는 반응을 봤어요. 만약 거장이 되고 싶다면 그런 식으로 스타일을 구축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제 자리에서 잘하고 싶은, 꽤 괜찮은 감독. 그 정도를 꿈꿔요. 작품을 마칠 때마다 다음이 없다는 생각에 불안해요. 하지만 ‘길복순’이 우연히 시작한 프로젝트이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도 또 다른 이야기를 찾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뭐라도 생각나겠죠. 지금 머릿속엔 ‘길복순’ 생각뿐이지만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