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다섯 개 ★★★★★”라는 ‘지정생존자’ 봤더니 [넷플릭스 도장깨기①]

“별이 다섯 개 ★★★★★”라는 ‘지정생존자’ 봤더니 [넷플릭스 도장깨기①]

“별 다섯 개”라는 넷플릭스 ‘지정생존자’ 봤더니

기사승인 2019-01-12 07:00:00

“정신 차려보니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더라구요.”

얼마 전 넷플릭스 리뷰 시리즈를 기획 중이라는 얘기에 같은 회사 후배 S는 ‘지정생존자’ 얘기를 꺼냈다. 최근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다는 극찬이 이어졌다. 어머니와 함께 밤을 새면서 봤다는 따뜻하고도 장엄한 무용담도 등장했다. ‘나와 앞으로도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당신도 이걸 봐야 한다’는 강력한 암시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와, 정말 그 정도로 재밌어?”라는 말 뒤에 숨겨진 ‘꼭 봐야 하나…’라는 속마음을 눈치 챈 걸까. 후배 S는 결정타를 날렸다.

“이건 정말 별 다섯 개 드라마예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인간적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모 돌침대 광고가 아닌 이상에야 일상에서 ‘별 다섯 개’라는 말을 직접 듣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작품 평가에 늘 조심스러운 후배 S가 이토록 명쾌하게 발언하는 것 역시 2년 만에 처음 봤다. 장안의 화제인 JTBC ‘SKY 캐슬’과 SBS ‘황후의 품격’ 등 챙겨봐야 할 드라마가 많은 현실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와 영화 얘기를 듣게 되거나 추천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지정생존자’는 지진희 주연의 tvN 드라마로 올해 리메이크될 예정이다. 언젠가 봐야 한다면 지금이다. 첫 ‘넷플릭스 도장깨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넷플릭스에 접속했다. ‘지정생존자’를 검색하니 파란 배경에 한 쪽 입 꼬리를 올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외국인 아저씨의 모습이 작은 이미지가 떴다. 그의 눈 주변을 지나가는 빨갛고 두꺼운 가로줄 위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미지를 본 순간 ‘지정생존자’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든 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나는 미국을 찬양하는 내용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미국의 정치 상황을 영화나 드라마가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미국, 또 미국을 부르짖는 이야기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허탈했던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두 번째는 대체 지정생존자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었다.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정치 용어를 굳이 제목으로 해야 했는지 의문이었다.

찝찝한 마음으로 ‘지정생존자’ 이미지 위로 커서를 올렸다. “‘블랙리스트’ 또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팬이라면 꼭 봐야할 콘텐츠”라는 설명이 나왔다. ‘블랙리스트’는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아래쪽을 가리키는 버튼을 누르자 이미지 아래로 보다 자세한 정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공할 테러로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워싱턴. 이제 미합중국의 운명이 하위 각료 한 사람의 손에 달렸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정치 스릴러”라는 두 줄짜리 설명이 등장했다. ‘미국 TV 드라마’, ‘몰입감 최고 TV 드라마’라는 장르와 함께 ‘긴장감, 흥미진진’이 프로그램의 특징이었다. ‘몰입’과 ‘긴장’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대단한 자신감에 감탄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을 적지 않고 짧은 두 문장으로만 드라마 전체를 설명하는 과감한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지정생존자’ 시즌1은 42~44분 정도의 에피소드 21개로 구성됐다. 전체를 보려면 약 15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주연 배우 명단에서 키퍼 서덜랜드의 이름을 보는 순간 믿음과 안정감,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미국드라마 ‘24’ 시리즈의 잭 바우어 역할로 잘 알려진 키퍼 서덜랜드는 리암 니슨과 함께 이름만으로 신뢰를 주는 몇 안 되는 배우다. 그가 주인공이라면 보통 주인공들보다 몇 배 더 심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쉽게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준비는 모두 마쳤다. 신중하게 마우스를 컨트롤해 ‘지정생존자’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는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4시간에 걸쳐 드라마 여섯 편을 연달아 봤다. ‘지정생존자’는 재생을 멈출 타이밍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다음 회차를 보기 위해 손을 움직일 필요도 필요 없었다. 한 편이 끝나면 곧바로 10초 카운트를 시작한 다음 자동으로 다음 편을 넘어간다. 밥을 미리 먹어둬서 다행이었다.

그 후 며칠에 걸쳐 ‘지정생존자’ 시즌1 감상을 마쳤다. 과연 후배 S의 극찬은 틀리지 않았다. 흥미진진하면서 긴장감이 넘치고 몰입도 역시 대단했다.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동시에 각 에피소드마다 완결성 있는 점도 좋았다. 그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매끄러워서 이어보기가 수월했다. 일부러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들어 사이다를 들이키게 하는 대신 어떻게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전개 방식도 흥미로웠다. 매회 새로운 진실과 해결의 실마리를 눈앞에서 흔들어대는데 따라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는 방식이 ‘지정생존자’의 가장 독특한 점이었다. 첫 회에서 발생한 워싱턴 테러 사건은 정치 드라마와 범죄수사 드라마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정치 드라마는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인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이 주인공이고, 범죄수사 드라마는 FBI 심리작전 요원인 한나 웰스(매기 큐)가 주인공이다.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주인공도, 장르도 다르다. 서로의 이야기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사건에서 시작해 같은 결말로 나아가는 동질감 때문이다. 각 이야기의 단점도 메워주니 이처럼 좋은 남매가 없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든 우려도 해소됐다. 사실상 드라마 속 모든 이야기가 지정생존자라는 개념 때문에 출발한다. 첫 회 첫 장면부터 지정생존자의 정의와 개념을 설명해 시청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친절함도 돋보인다. 또 지정생존자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드라마 내내 등장한다. 이에 대한 고민이 주인공의 약점이자 정체성이 되는 걸 보고 제목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했다.

미국에 대한 태도는 평이 엇갈릴 여지가 있다. 분명 ‘우리는 미국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 ‘미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정서가 드라마 전반에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 미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들 역시 등장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론으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보다 쉽게 돌파해나간다. 그 이상론이 미국만이 아닌 보편적인 국가의 이상과 맞닿아 있어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인 현실에서 이 정도 판타지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힘 있게 달려가는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동력이 떨어진다.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산적해 있던 초반부의 문제와 사건들이 하나씩 해결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13회 이후의 후반부를 볼 때는 전반부에 쌓아놓은 등장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큰 도움이 됐다. 그럼에도 마지막 3회 정도는 손이 가지 않아 한참을 방치해뒀다. ‘도장깨기’ 시리즈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마지막회를 영원히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넷플릭스는 결말을 보고 상념에 잠길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음 회가 자동 재생되는 걸 지켜보다가 시즌2 1회라는 걸 알고 서둘러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정적이 찾아왔다. 분명 넷플릭스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들과 다른 건 확실했다. 하지만 드라마 한 편으로 일상의 변화를 체감하거나 넷플릭스에 푹 빠지는 경험이 찾아오진 않았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많다. ‘지정생존자’를 보는 동안에도 추천 받은 넷플릭스 작품들이 쌓였다. 그렇게 넷플릭스의 첫 도장을 깼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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