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법무법인에 의견서를 제출한 대가로 18여억원을 받아 논란이 된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의견서와) 관련된 로펌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회피신청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의견서 내용을 제출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비밀유지의무를 들어 거부했다.
권 후보자는 11일 국회에서 열린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 눈높이에서 볼 때 고액의 소득을 얻게 된 점에 대해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권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18~2022년 김앤장과 세종, 태평양, 율촌 등 7개 대형로펌이 맡은 38개 사건에 대해 법률의견서 63개를 제출하고 18억1562만원(세후 6억9698만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권 후보자는 “비록 독립적 지위에서 학자의 소신에 따라서 의견서를 작성·제출했지만, 공정성 우려가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며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에서 정한 모든 신고·회피 신청 절차를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법원에 올라온 대형 로펌의 사건이 많을 것이다. 상당수 사건을 회피해야 할 것 아닌가”라며 대법관 역할 이행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권 후보자는 “공정성을 해할 상황인지, 직무수행을 못할 상황인지는 대법원장이 판단하게 돼 있다”며 “(당사자가) 기피 신청을 할 필요 없도록 제가 관련한 모든 사건에 대해 회피 신청을 하겠다”고 답했다.
다만 어떤 사건을 자문했는지를 밝혀달라는 야당 의원들의 요청에는 ‘비밀 유지 의무’를 내세워 공개를 거부했다. 권 후보자는 “구체적인 사건 정보와 의견서를 제출하기 어렵다. 비밀유지의무 논란이 있고 의견서가 로펌의 정보라고 볼 여지도 있다”라며 “국내 법원에 제출된 경우에는 공개가 제한되는 소송기록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법적 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난색을 표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권 후보자가 2018년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소송 중이던 하나금융지주 쪽 법무법인 태평양의 의뢰를 받고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법률 의견을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당시 하나금융이 승소하면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론스타와 분쟁 중이었던 우리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며 당시 제출한 법률의견서의 내용 확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권 후보자는 “론스타 쪽을 대리하는 로펌의 의뢰를 받아 증언하거나 의견서를 작성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부인하며, 자료 제출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날 청문회에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재임 중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은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내에서 사법부가 인적구성과 주요한 정치적 판결에 편향성을 보여왔다”라며 이재명 대표의 과거 선거법 위반 혐의 판결, 전교조 합법화 판결 등을 예시로 들었다.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도 “김 대법원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보느냐”라며 “대법원장이 정치적 중립성 위반에 휘말리는 행태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권 후보자는 “법원이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봐야 할 문제”라며 “정치적 편향성이 있는 판결일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법부의 독립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법관으로 임명된다면 정치적 이념이 어떤 형태이든 판단에 개입되지 않도록 최대한 사법부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겠다”고 부연했다.
앞서 권 후보자는 이날 인사말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철저히 지키고, 보수와 진보의 구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대법관으로 임명된다면 정치적 중립성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철저히 지키겠다”라며 “획일성과 편견의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 보수와 진보의 구도를 벗어나 미래로, 세계로 향하는 사법부의 일원이 되겠다”고 했다.
이번 인사청문회 준비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권 후보자는 “이번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저는 저와 제 가족이 남긴 삶의 거의 모든 궤적을 돌아봤다”며 “더 성실하게, 더 철저하게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느꼈다. 이처럼 부족한 제 역량과 삶에 비해 대법관의 책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대법관으로 임명된다면 더욱 낮은 마음으로 그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겠다”며 “다수의 큰 함성 뿐만 아니라 소수의 작은 목소리도 경청하겠다”고 강조했다.
권 후보자는 서경환 후보자(57·21기)와 함께 이달 퇴임하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으로 제청됐다. 서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다음날인 12일 열린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