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정부에서 한때 제동이 걸렸던 ‘제주형 건강주치의제도’가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주치의제는 의료비 부담과 불필요한 병원 방문을 줄일 수 있어 해외 선진국에선 이미 널리 자리 잡은 방식이다. 하지만 국내 의료 현실과 수가체계, 인력 배치 등 구조적 문제를 감안할 때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25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제주도는 ‘건강주치의 시범사업’과 관련해 최근 보건복지부와 조건부 협의를 마치고 본격적인 추진 준비에 들어갔다. 제주형 건강주치의제는 65세 이상 노인이나 12세 이하 아동이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주치의에게 질병 예방부터 치료, 관리까지 통합적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건강주치의로 등록한 의사에겐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빠르면 오는 10월 사업이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장은 복지부 장관과 협의를 통해 지역 복지제도를 만들 수 있다. 이에 제주도는 지난 3월부터 정부와 사회보장제도 협의를 진행했으나 사업이 구체적이지 않고 기존 사업과의 중복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번번이 재협의 통보를 받았다. 흐름이 바뀐 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주치의제 활성화는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된 내용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에는 △주치의 중심 맞춤형 1차 의료체계 구축 △주치의제 운영 및 방문·재택 진료에 대한 보상체계 강화 △노인·소아질환 중심 단계별 주치의 등록 활성화로 전 국민 주치의제 추진 등이 담겼다.
건강주치의제가 탄력을 받게 되면서 제주도는 시범사업 진행 2년간 등록 환자의 진료비 증감과 입·내원 일수, 서비스 질 등의 제도 성과를 평가해 사업 지속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복지부가 협의 과정에서 권고한 △주치의 의료기관 선정 기준 및 성과 평가 기반의 지불방식 마련 △의료기관 역량에 따른 등록 환자 규모 차등 설정 △기존 유사 사업과의 중복 방지 및 연계 방안 제시 등도 반영할 방침이다. 또 사업 시행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확보, 주치의 지원센터 구축, 담당 인력 역량 강화 교육 등이 진행된다.
의료비 지출 증가→건보 재정 감소 악순환
주치의제는 이미 덴마크,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여러 선진국에서 시행 중이다. 덴마크와 영국에선 자신의 거주 지역에 주치의를 두지 않으면 대부분의 전문의 진료가 제한된다. 한국에서 그동안 주치의제가 시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주치의제 도입 시도가 있었지만, 완벽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 현재는 만성질환, 장애인, 아동 치과, 치매 등 일부 질환에 대한 시범사업이 분절적으로 진행 중이다.

주치의제의 핵심 목표는 고령층과 아동 등 의료취약 계층의 일차의료를 강화하며, 동네의사 중심의 맞춤형 건강관리 체계를 구축해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의료비 지출 증가는 건보 재정 감소로 이어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0년 87조원이던 건강보험 진료비는 2023년 112조원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 중 노인진료비는 2023년 기준 49조5000억원으로 44%, 만성질환 진료비는 43조원으로 39%를 차지했다. 특히 한국의 국내 총생산 대비 경상의료비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단체와 학계 등은 주치의제가 전국에 자리 잡으려면 주치의에 대한 국민들의 수용성을 높이고, 현행 건강보험 지불체계의 바탕이 되는 ‘행위별 수가제’ 대신 ‘혼합병 지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진찰료, 검사료, 처치료, 입원료 등 모든 개별 의료 행위마다 단가를 정해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는 지불의 정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료 행위가 많을수록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 탓에 이른바 ‘3분 진료’나 ‘과잉 진료·검사’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치료에 필요한 자원의 소모량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오랜 기간 경험을 쌓은 의료인의 행위보다는 장비를 사용하는 검사에 대한 보상이 커져 필수의료가 소외되는 문제도 생겼다.
반면 혼합형 지불제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수가 체계로, 기존 진료 행위는 수가로 보상하되 만성질환 관리율, 재입원률 감소 등 환자 치료·관리 성과에 따라 의료진에 보너스를 지급하는 구조다. 주치의제를 도입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혼합형 지불제를 사용하고 있다.
“제주형 건강주치의제, 전국 주치의제 확산 마중물 돼야”
전문가들은 주치의제가 확대되면 고령화와 만성질환자 증가로 빠르게 늘어나는 의료비 지출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재호 가톨릭의대 가정의학교실 교수는 “대부분의 선진국은 주치의를 두고 의료를 이용하는 게 일반화된 상태에서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는 그런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치의라는 ‘숟가락’을 올리는 격”이라며 “국민들이 주치의 없이 의료를 이용하는 상태를 방치하고 행위별 수가제로 의료 현장을 유지해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늘고 의료비가 증가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제주형 건강주치의제가 주치의제 확산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선 중앙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국민 모두가 주치의를 두고 의료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의료계는 주치의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장애인 주치의제도 등 여러 시범사업을 통해 이미 주치의제 확대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서 주치의에 대한 국민 수용성이 얼마나 될지, 행위별 수가제 정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명확한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짚었다. 신 교수는 “주치의가 노인 환자 한 명 보려면 진단, 치료, 교육 등 플랜을 짜야 하는데 못해도 30분은 걸린다. 동네 의원 입장에선 그 시간에 더 많은 환자를 보는 게 현실적으로 더 이득”이라며 “주치의 활동만으로 수익이 날 수 있도록 보상체계를 설계하지 않으면 성공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치의제는 가정의학과만의 제도도, 특정 집단을 위한 것도 아니다. 지속 가능한 생애주기 관리와 가족 중심의 케어, 국가 보건의료 체계 지속과 관련된 문제”라며 “지금의 세분화·분절화된 진료 구조에서 의료비 소진은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포괄적 진료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게 주치의제다”라고 피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