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리그를 주최하는 한국기원의 행마가 ‘정수’가 아니라는 점이 한몫했다. 최소 4경기를 진행했던 라운드를 3경기 만에 끝날 가능성이 있도록 바꾸고, 감독 재량으로 선발하는 선수 숫자를 늘리면서 동시에 후보 선수를 ‘외국 소속 프로기사’로 제한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변화는 1분 10초 ‘피셔룰’로 대국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 모든 내용이 한국기원 공식 발표가 아니라, 한 언론의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바둑을 ‘예와 도’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고, 예술이나 문화의 영역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 가운데 한국기원은 일찌감치 바둑이 스포츠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다른 스포츠 단체였다면 중차대한 결정을 할 때 소속 선수들의 의견을 묻고, 팬들에게도 충분한 설명을 내놓았을 사안들을 한국기원은 ‘깜깜이’로 진행해 비판에 직면한 적이 많다.
대표적으로 2022-2023 시즌 KB국민은행 바둑리그 당시, 한국기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계시기를 쓰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시계를 도입한 사례가 손꼽힌다. 2021-2022 시즌 바둑리그 72경기 360국이 진행되는 동안 단 2번만 나왔던 ‘시간패’가 개막 3주차, 12경기 만에 총 9차례나 터져 나왔다. 사실상 매 라운드마다 시간패로 승부가 끝난 셈이다. 바둑리그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시범 경기 등 사전 대국을 통해 시계에 적응하고,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기계적 결함을 지적‧보완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던 탓이다. 결국 한국기원은 기존 계시기로 전면 교체하는 ‘백기 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3일이 지난 17일에도 한국기원은 바둑리그와 관련된 어떤 공식 입장도 내지 않았다. 바둑리그가 ‘위기’ 상황이고,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바둑TV 시청률 또한 곤두박질치고 있는 국면에서 내부 회의를 통해 이처럼 결정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 전부다. 한국기원 내부 회의에 누가 참여했는지, 대폭 변화를 준 바둑리그의 변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근거로 ‘10초 피셔’를 도입했는지 등 모든 점이 현재까지 깜깜이다.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경험이 있는 한 프로기사는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올해부터 바둑리그가 1분 10초 대국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예전에 우승한 적도 있지만 ‘중위권’ 기사로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고 운을 뗀 이 선수는 “중위권 기사들은 사실상 ‘1년 농사’가 판가름 나는 바둑리그에 ‘올인’하고 있는데, 10초 피셔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모든 프로기사의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것’ 또한 이제 바둑리그와는 거리가 다소 멀어졌다. 아무리 훌륭한 기량을 지닌 바둑기사라도 10초 바둑에서 개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초 바둑을 한 번이라도 둬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초읽기’ 소리에 대한 걱정도 지울 수 없다. ‘하나, 둘, 셋’ 초를 읽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10초 바둑 방식이 과연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바둑리그와 잘 맞을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바둑리그 타이틀 스폰서인 KB국민은행은 지난해까지 10억원 후원하던 금액을 올해부터 7억원으로 대폭 삭감했다. 국민은행은 바둑리그에 7억원, 2부 리그격인 챌린지리그에 3억원을 후원해왔는데, 올해는 챌린지리그를 국민은행이 개최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은행 후원금이 큰 폭으로 축소된 이유에 대해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챌린지리그는 바둑리그와 연동되지 않는 별개의 리그이므로, 1부 리그인 바둑리그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챌린지리그는 이전까지 ‘퓨처스리그’로 불리며 바둑리그 선수와 서로 호환이 되는 구조였다. 정규시즌은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도 퓨처스리거 선수가 바둑리그 무대에 깜짝 등장해 ‘대타 홈런’을 친 사건도 종종 있었다.
문제는 결국 홍보와 소통 부재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챌린지리그는 지난 시즌 ‘쿼터제 릴레이’ 대국을 펼치며 한 판의 바둑을 여러 명의 선수가 나눠 두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선수 교체 타이밍에 팀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작전타임’을 사용해 바둑을 두다 말고 ‘훈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나 한국기원의 홍보 부족 탓에 오랜만에 선보인 참신한 시도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바둑TV에서도 선수 교체 장면이나 작전타임을 사용하고 작전 지시를 받는 장면 등을 중계하지 않았다. 한국기원의 별도 설명도 없었고 현장감 있는 생중계를 보여주지도 못했던 탓에 바둑 팬들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시즌이 끝날 때까지도 잘 알지 못했다.
이제 소통과 홍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때다. 그동안 ‘불통’ 한국기원의 이미지를 벗고 미디어는 물론 바둑 팬들과도 적극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스포츠를 표방하는 바둑리그를 놓고도 ‘밀실 행정’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전환하지 않는다면 국민은행이 바둑리그에서 발을 빼는 최악의 사태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